당신의 생각이 곧 당신의 미래다.
프롤로그
요즘 우리의 문제는 질문을 던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답이 없다 생각하고 좌절하지요. 자신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모르고 말입니다. 설사 질문을 하려해도 누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포기합니다. 어린 시절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선생님이나 부모님을 찾았듯 고전 즉 옛 현자들에게 답을 구했으면 합니다. 고전은 살아있는 현실이고 미래입니다. 세상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미국자본가, 조지 소로스는 고전을 열심히 공부했고 워렌 버핏의 스승 찰스 멍거는 투자 강의에서 4시간동안 철학만 이야기 합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철학을 공부하면 투자를 잘할 수 있다.”였습니다. 조지 소로스의 자본축적과정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다른 형식으로 진화합니다. 동구권에 대한 기부를 통해 사회변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결론은 소위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고전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켰고 원동력을 얻은 반면, 정작 그 아래서 짓밟히고 있는 사람들은 고전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지배계급은 항상 지식을 독점하려 했죠. 그리고 대중이 지식에 눈뜬 순간,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고전에는 두 가지 혁명이 있습니다. 사회를 바꾸고 시대를 바꾸는 것이 나를 둘러싼 외부, 관계에 대한 혁명이라면 자신을 바꾸는 것은 자아혁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아혁명을 위해서는 먼저 각성을 해야 합니다. 삶에 대한 의미를 짚어봐야 하는 거죠.
우리는 성공이라는, 사회에서 정해준 사다리를 올라가려고만 했어요. 그 사다리는 경쟁을 해야만 오를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극소수고 나머지는 사다리 위를 오르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인 것은 정작 우리는 사다리 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고전은 왜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지, 사다리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 줍니다.
Part1 당신의 생각이 곧 당신의 미래다.
이 시대의 혁명이란, 세상을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뒤집는 것이다. 새로운 생각은 넓고 깊은 생각에서 싹트는 법. 시대의 장벽을 넘어 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온 생각, 즉 고전이야말로 다르고 새로운 생각을 꽃피울 수 있는 씨앗이다. 고전으로 혁명하라! 이는 곧 생각의 혁명이다.
1991년 일본 최대 사과 생산지인 아오모리현을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며 사과의 90%가 떨어져 모든 사람이 시름에 잠겼다. 한 농민이 입을 열었다. “남은 10%의 사과를 ‘떨어지지 않는 사과’로 팔면 어때? 시험에 절대 떨어지지 않는 합격사과 같은 거.” 1991년 일본의 대표적인 히트상품이 되었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쳤던 것처럼 혁명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끙끙 앓으며 고민하던 문제의 해결책을 찾았을 때, 그때 우리는 혁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이란 경중을 떠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것이 기존의 질서를 뒤집고 새로움을 세우는 일이라면, 생각의 프레임을 바꾸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 역시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혁명의 정의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일 역시 혁명의 시작인 셈이다.
혁명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생각”이다. 사과를 과일로 인식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뉴턴처럼, 아오모리현의 농부처럼, 스티브 잡스처럼 바라볼 때 비로소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전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것을 얻는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혁명이란 생각을 깨우는 일이다. 1947년 국어학자 최현배는 국어정책에 관한 연구서인 “글자의 혁명” 이란 책을 발간한다. “한자 안 쓰기”와 “한글 가로쓰기”, 현재 시선으로 볼 때는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한 일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기에 “글자의 혁명”은 적절한 제목이었다.
기존의 세계관을 뒤엎는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르는데, 아르키메데스, 뉴턴, 코페르니쿠스는 뛰어난 능력이 있으니 혁명적 발상을 한 것인데 과연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굳이 우리가 혁명해야할 이유가 있을까? 결론은 명백하다. 혁명해야만 한다. 계속되는 경제위기로 인한 치열한 칼바람 속에서 우리가 깨달은 사실은 한가지다. 국가도 사회도 그 누구도 나를 지켜줄 수 없다. 광풍 속에서 바람막이가 돼줄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시대에 휩쓸려서는 이 사회를 살아 나갈 수 없다. 무슨 변화가 또 생길지 넋 놓고 앉아있을 수 없다. 세상의 중심이, 삶의 중심이 이제는 “나”가 돼야 한다.
사회에 대한 불신이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한 요즘이다. 속았다고 말하고, 당했다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속지 않았다. 그들이 속인 게 아니라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것이 정당한지 부당한지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에 민심이 쏠렸으나 살린다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살린다는 것인지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했다면 조금 더 고민했다면, 다시 말해 스스로 철학하고, 내 삶의 혁명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면 그때의 이야기들이 나를 위한 것인지, 그들을 위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고전일까? 고전으로 어떻게 생각혁명을 이룰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고전이 시대를 돌파해온 생각이기 때문이다. 고전은 당대의 문제작으로 치열한 고민과 현실에 맞선 몸부림을 통해 탄생했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힘이 있다. 고전은 시대를 넘어 변화를 주도해 왔고 정신, 물질, 인문, 과학 측면에서 진행되었기에 우리가 어떻게 변화를 주도할 것인가 알게 해준다.
시대의 현자들이 살았던 그때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그리 다르지 않다. 나타나는 양상은 다를지언정 해결해야 할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두 동일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고 세상을 바꾸었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한다. 그들이 바라본 세상과 이를 바꾸고자 한 노력을 되새김질하며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바꿀지, 생각과 의식의 자양분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고민하고 지향할 생존은 단순히 살아남음이 아니다. 이 시대의 생존이란 나다운 나, 삶다운 삶의 지향을 뜻한다. 그냥 되는대로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살겠다는 외침이다. 익숙한 생각을 깨야 새로운 생각이 태어난다. 만들어진 세계를 깨트려야 원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두 발로 우둑 서고 싶다면, 내가 원하는 나,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이제 21세기 역사의 기관차에 올라탈 차례다. 그리고 기관차에 오를 수 있는 기차표는 고전이다.
만약 공기가 없다면, 물이 없다면...이란 가정을 자주 하지만 “고전이 없다면”이란 가정을 하지 않습니다. 고전이 없다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세상일 겁니다. 고전이 없다는 것은 생각이 없다는 뜻인데, 아무런 가치나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그저 생존만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생각 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그저 아파만 하는데 왜 아픈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없어요.
사실 고전은 자신의 권리를 찾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고전을 읽어야 지배계층의 잘못된 것에 저항할 수 있고 우리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어요. 사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혁명은 불꽃처럼 일어났지만 불꽃처럼 사그라집니다.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이면에는 근본이념을 제공한 사상가와 고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 난 어떻게 살지, 뺏기지 않고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힘이 인문고전을 읽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오거든요. 고전은 이 사회에서 삶의 길이 되고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자신을 혁명하고 시대를 바꾸는 방법이 바로 고전이며 고전을 통해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