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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 고전혁명(2) (이지성, 황광우著 생각정원刊)

흔들리되 무너지지는 말아야

by 물가에 앉는 마음


Part2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림이 없다.

살고자 하는 생존본능은 모든 이가 평등하게 갖고 태어난다. 태어나자마자 모두 어머니 젖을 찾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초기의 것과는 다르게 진화한다. 성인의 생존본능, 제2의 생존본능이란 자신이 태어난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 잘 살아남으려는 본능이다. 만일 당신이 지금 주위를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하고만 있다면 당신의 생존본능은 퇴화중인지 모른다. 우리는 퇴화하고 죽어가는 생존본능을 살려야 한다. 그 시작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다.


儒家(유가)에서 聖人(성인)은 孔子(공자)이며, 亞聖(아성)은 孟子(맹자)다. 맹자는 송, 제, 양, 노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지만 세상은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학식이 높고 언변이 뛰어났으나 왕 아니라 그보다 높은 사람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낼 정도로 소신이 강했기에 철저하게 소외당했다. 용기라는 것은 당당함으로 상대가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당당한가다.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면 어린아이 앞에서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스스로 떳떳하면 어떤 반론이나 외압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내세울 수 있다. 맹자의 용기를 흔히 호연지기라 하는데 이는 하늘의 도와 정의에 뿌리를 둔 공명정대한 것이다. 맹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스스로의 가치로 존귀한 자신이 선택한 조귀한 가치를 버리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버리고 사느니 맹자는 자신을 잃지 않는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나의 판단과 규정은 절대적일 수 없다. 그럼 규정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판단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말하는 것, 이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나쁘다고 여기는 것, 우리는 버릇처럼 겉을 보고 속을 판단하며 나를 통해 타인을 재단한다. 그런데 판단의 대상은 늘 바깥에 있고 판단의 기준은 내 안에 있다. 타인의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거나, 타인에 의해 나를 규정하는 일은 쉽게 행해지지 않는다. 세상의 수많은 나는 모두 자신이 옳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세상에 수많은 나만큼의 수많은 옳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타인의 옳음과 나의 그름을 쉽게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직 하나의 기준을 가진 사람은 다른 기준을 만났을 때 당황하고 흔들린다. 장자는 이야기 한다. 생각을 바꾸고 발상을 전환해서 세상을 보라고 말이다. 그러면 더 큰 나를 만날 수 있다. 커진 나는 다른 사람까지 품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 그렇게 되면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포용과 조화가 가능해진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가 믿고 따를 대상은 바로 인간 자신, 인간을 초극한 인간인 초인이다. 초인이란, 자신을 가두지 않는 자다.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지 않고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다. 결국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결국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한계를 안다는 것은 한계를 벋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극복해야 할지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인이 되는 방법은 명확해진다. 자신을 알고 그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말한 이가 니체인데 고전은 그런 것이다. 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시도하고 도전하라고 독려한다. 그리고 시도와 도전은 혁명과 혁신을 부른다.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CEO는 브루클린 빈민가에서 태어나 미식축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지 않았다면 대학진학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는 한계를 거부해 삶의 전부였던 운동을 포기하고 1976년 제록스에 입사해 3년 만에 최고 세일즈맨으로 등극했고 1979년 가정용품업체 부사장으로 스카웃되었다. 그런데 또다시 스스로의 삶을 뛰어넘었다. 1982년 우연한 기회에 커피원두 판매업체에 불과한 스타벅스의 존재를 알게 되어 마케팅담당 이사로 이직하는 모험을 강행했다. 슐츠는 ‘당신을 비웃거나 무시하는 사람 들 때문에 패배감을 느끼면 안 된다. 빈민촌 출신인 어린 내가 헤쳐 나갔던 그 역경들을 생각해보라.’고 조언한다. 이는 슐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거인으로 우뚝 선 이들은 모두 한계와의 처절한 싸움에서 소리를 높인다. ‘스스로 한계나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미리 결정하지 마라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을 실천하지 않았다는 의미며, 이는 결국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학’에서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수신제국평천하’인데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케 하는 첫걸음이 자신을 닦는 일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동양 고전은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방점을 찍고 있다. 서양에서 가장 성실하게 자신을 다스린 사람을 꼽으라면 칸트일 것이다. 서양철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그는 생활에 엄격한 것으로 유명했다. 차 마시고 집필하고 산책하는 칸트의 일상은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오차가 없어 동네 사람들은 회색코트를 입고 등나무 지팡이를 들고 산책하는 그를 보고 멈춘 시계의 시간을 맞췄다.


자신을 다스리고 실천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자신에 대한 불신인지 모른다. 동양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고민이 있어왔고 인간 본성에 대해 성선설, 성악설도 있으나 이들 주장 모두 인간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악설도 인간은 악하지만 변할 수 있고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고 성선설도 인간은 선하지만 악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인간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열정에 바칠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한계를 짓는 패배주의에 빠질 것인가?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했다.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굳건하게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는, 우리에겐 자신에 대한 한없는 긍정과 믿음이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는다 했다. 가뭄에 마르지 않는 물은, 우리에겐 끝없는 정진과 실천이다. 어떤 조건이나 단서 없이 자신을 온전히 믿어줄 사람은 자신뿐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더 좋은 삶을 살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라. 믿음을 동반자이자 조력자 삼아 정진한다면 그 길의 끝에 당신이 원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지만 ‘흔들리되 무너지지는 말아야’ 합니다. 꿈과 목표도 없이 휩쓸리는 것과 흔들리더라도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은 확실히 다릅니다. 먼저 꿈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흔들리지 않고 단단히 만들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고전에 있습니다. 인문학 공부도 산회 전체가 할 수 없다면 개인이라도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세상에 끌려 다니지 않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며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치유방법도 찾을 수 있고요. 고전이라는 것은 낯선 공간, 낯선 과거의 시간을 여행하다 어느 순간 자신과 만나는 것으로 그때 무엇인가 깨달음이 머리와 가슴을 강타하겠죠. 자신을 작다고만 생각하면 허리밖에 차지 않는 물에도 빠져 죽을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강하고커다란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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