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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 고전혁명(3) (이지성, 황광우著 생각정원刊)

누구나 변화를 꿈꾼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Part3, 변화는 변화를 이끈다.

일곱 조각으로 이루어진 피자를 나누는데 한사람이 세 조각, 다른 한사람이 두 조각을 가져가고, 나머지 두 조각을 백사람이 나눠야 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다수는 백사람이 아닌 다섯 조각을 가진 두 사람이 된다. 두 사람이 다섯 조각의 피자를 독차지하고 나머지 백사람이 두 조각의 피자를 갖는 것이 옳은가? 지금껏 대다수의 우리는 피자가 몇 조각인지, 내가 가진 피자의 양이 얼마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많은 수의 사람이 외롭고 힘들고 지친 삶을 사니 내가 힘들고 외롭고 지친 삶을 사는 것도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우리에겐 오래된 고민이 하나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물론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는 나’와 ‘사람들이 아는 나’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내가 아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주변에서는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아는 나는 이런 사람인데, 주변에서는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또 이런 경우도 있다. ‘내가 아는 그’와 ‘그가 말하는 그’가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아는 내가 진짜 나일까? 누가 아는 그가 진짜 그일까? 답은 둘 다다. 내가 아는 나와 사람들이 아는 나는 전혀 다른 대상이 아니다. 그 모두의 인식이 합쳐져 온전한 내가 규정되는 것이다. 나의 기준, 나의 생각뿐 아니라 상대의 기준, 상대의 생각도 포용하는 순간, ‘나’는 ‘우리’가 되고 관계혁명이 시작된다.

내가 아는 잣대로만 상대를 판단해서는 그를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나의 잣대로만 상대를 판단한다. 게다가 상대를 재단하는 잣대는 무척 엄격하고, 반대로 나를 제단 하는 잣대는 관대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생각해보야 한다. 나는 과연 상대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논어에 군자는 和而不同하고, 소인은 同而不和 한다고 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지만 이들과 화목하게 지낸다는 뜻이고, 소인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화합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군자는 생각이 나와 달라도 배척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고, 소인은 차별한다는 것으로 나와 의견이 달랐을 뿐인데 틀렸다고 말하고 악다구니를 써서 상대가 말을 못하면 내가 이겼다고 좋아하며, 내 이야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졌다고 풀이 죽는다.


자신의 논에 물을 끌어 온다는 뜻의 사자성어가 我田引水(아전인수)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거나 자신에게 이롭도록 할 때 인용하며 반대의 뜻은 易地思之(역지사지)라 할 수 있다. 易地思之란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는 뜻이다. 나를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기준에서 상대를 이해해보는 것을 말한다.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본다고 해도 그의 생각이나 행동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다름을 틀렸다고 말하며 배척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다름을 다름 그대로 인정할 때, 내게 이런 생각이 있듯이 상대에게 저런 생각이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일 때, 나는 우리가 된다. 상대 역시 그의 입장에서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렇게 세상은 ‘수많은 나’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의 세상은 이전까지의 세상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더 많은 것이 들리게 되리라. 그렇게 나와 상대, 나와 세상과의 관계는 깊고 넓어지게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두 가지일지 모른다. ‘나로부터 세상을 보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나와 연결된 세상을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광속으로 변하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나약한 인간은 불안하며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변화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고 중간 중간 변화의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변화의 신호를 幾微(기미)라고 하며 주식투자자가 밤 새워 뉴욕 증권가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다음날 증권시장에 미치는 여파, 즉 기미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다.

기미를 읽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관심이다. 사람이든, 경제든 관심을 기울이고 바라보면 미세한 차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제와 오늘은 무엇이 다른지, 좋을 때와 나쁠 때는 어떤 식으로 변화가 나타나는지, 이러한 징후들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변화를 좀 더 빨리, 좀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휘둘리느냐 이끄느냐의 차이는 누가 더 많이 아느냐 에서 판가름 난다 이것은 지식과 정보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을, 세상을, 변화를 얼마나 열심히 읽고, 그리하여 얼마나 많이 알고, 깊이 이해하느냐에 따라 변화를 주도할지 변화에 휩쓸릴지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파도의 방향, 높이를 예측하는 사람은 파도를 타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파도에 휩쓸리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변화를 꿈꾼다. 성장을 지향하고 발전을 도모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 지금보다 더 좋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기를 희망한다. 변화에 대한 갈망과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갈구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릉도원이란 서양의 유토피아와 같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릉도원을 그리며 정작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에는 무관심하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곳을 보려고 기를 쓰면서 정작 눈앞의 사회는 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아니 보지 않는 것은 아닐까?

복잡다단한 시대에 ‘내 앞가림하기도 벅차’ 나 하나의 삶도 고달파 다른 이들의 삶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이나 나와 타인, 나와 세상을 분리하는 이런 태도로는 생존은 가능할지 모르나 변화와 성장은 불가능하다. 관심은 실천이다. 리더를 잘못 뽑았다고 육두문자를 풀어놓기 이전 리더를 뽑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실천 없는 비판은 무관심과 다름없다. 세상이 바뀌길 원하고 변화를 요구하려면 먼저 세상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고쳐야 할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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