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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5. 고전혁명(4) (이지성, 황광우著 생각정원刊)

시대의 벽을 넘어 살아남은 후에야 고전

by 물가에 앉는 마음

모든 고전이 애초부터 고전이었던 것은 아니다. 시대의 벽을 넘어 살아남은 후에야 고전의 칭호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이제 당신만의 고전을 쓸 차례다. 모진풍파와 거센 변화에도 살아남은 정신을 이어받아 긴 세월의 파고 속에서도 빛을 발할 생각을 실현 시켜봐라. 소개하는 열 펀의 고전은 당신만의 생각을 이끌 나침반이자 마중물이 될 것이다.


Part4, 거침없이 너만의 고전을 써라.

장자의 장자,

당신은 진실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 믿는가? 신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진실일까? 과학자들과 의사들의 말은 모두 옳은 걸까? 그 모든 것이 진실이라면 왜 같은 현장에서 같은 사건을 본 사람들이 각기 조금씩 다르게 묘사하는 걸까? 똑같은 신문기사를 읽고도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모두 각자의 프레임을 갖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진실은 누군가에게 허위일수 있다. 자신의 기준만 들이대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의 생각을 포용하기 어렵다. 아집을 버리면, 독선을 거두면, 세상의 많은 이야기와 생각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린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듣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세계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결국 발상의 전환이란 것도 그런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당연하지 않다 여길 때 새로움은 탄생한다.

장자가 꼬집는 것은 ‘너의 좁은 눈으로 세상을 재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은 겨우 가로 5~6Cm, 세로1~3Cm의 눈에 담길 만큼 작지 않다. 눈에 담기지 않는 세상이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볼 때 더 큰 자신과 만날 수 있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시대에서는 모든 지식이 진리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종교의 권위를 빌려야 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을 제시한다. ‘과학은 객관적이며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고 그 연구는 엄밀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과학관이 신뢰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관이 1950대까지 신뢰를 받았으나 1962년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발표되며 타격을 입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인은 필연적으로 상응하는 과학을 재정의 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옛날 문제들은 더러 다른 과학 분야로 이관되거나 또는 완전히 비과학적인 것으로 선언된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사람이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사람이 이 땅에 생기면서 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곳은 다시는 돌아가야 하지만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잃어버린 낙원이든 만들어 가야할 낙원이든 사람들은 언제나 낙원, 즉 유토피아를 그리워한다. 토머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는 다음과 같다. ‘유토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국가일 뿐만 아니라, 공화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공공의 이익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개인 재산만 돌보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에서는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의무와 열성을 기울입니다.’


혜능의 육조단경

賓頭說經(빈두설경)은 인생을 이렇게 묘사한다. 한 사람이 광야에서 미친 코끼리를 만났다. 도망치던 중에 우물을 발견했다. 다행스럽게 우물 안으로 등나무 줄기가 뻗어 있었다. 줄기를 타고 내려가 황급히 우물 안에 숨었으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바닥에는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흰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등나무 줄기를 갉아 먹는 게 아닌가. 그때 꿀을 따던 벌들이 흘린 몇 방울의 꿀이 그의 입으로 떨어졌다. 그는 꿀의 달콤함에 취해 자신의 위기를 잊었다. 흰쥐와 검은 쥐는 흐르는 시간이다. 꿀은 욕심이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사람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불교는 그곳에서 벋어나라고 한다.


사실 수행은 길을 가는 일과 같다. 그러나 사람마다 길을 가는 방법은 다르다. 사람도 만나고 잠시 쉬면서 풍광을 보고 싶다면 걸어가도 좋을 것이다. 기차 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자동차 타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가느냐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혜능이 살던 시기, 수행의 방법에 대해서 사람들은 논란을 벌였다. 그것은 청정한 마음의 상태를 중시하는 ‘정’과 지혜로움을 중시하는 ‘혜’의 논란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헤능은 아주 명료하게 정리했다. ‘정혜가 무엇과 같으냐 하면 마치 등과 등불 빛 같나니, 등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빛이 없는 것이라. 등은 이 빛의 본체요 빛은 이 등의 작용이므로 등과 불빛이 이름은 비록 다르나 본체는 같은 하나인 것처럼, 정과 혜도 이와 같으니라.’


공자의 논어

공자의 사상은 지금도 살아 있다. 도덕적 관념이 아니라 공자가 꿈꿔왔던 나라, 공자의 이상향이었던 대동사회는 현재 중국이 목표로 하는 미래이기도 하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은 국민이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사상적 논쟁을 벋어나겠다는 것이지 발전을 위해 국민의 행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등소평은 공자의 가르침대로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지도자에게 더 엄격한 도덕성과 자질을 요구 했다. 등소평 정책의 또 다른 성공요인은 중국을 단숨에 이상사회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78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선언하며 중국을 발전시킬 3단계인 溫飽(온포), 小康(소강), 大同(대동)을 제시했다. 온포는 배부르고 따뜻한 즉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회, 소강은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생활을 영위하는 경지로 현재의 중국이다. 대동은 모두가 화합하고 행복한 이상적인 경지이다. 대동이 실현될 수 없는 이상사회라면 소강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사회로 이미 이 천 년 전 공자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천하를 주유했다.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은 말했다. ‘대중은 우매하다.’ 안타깝지만 이 말은 아직도 유효하고 우리는 우매하다. 그래서 쉽게 속고 항상 자신의 발등을 찍는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 우리의 우매함이 여실히 드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속는다. 천연덕스러운 얼굴에 속고 눈앞에 증거를 들이대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짓말에 속고, 유명무실한 통계를 뻥튀기하는 과장된 정책에 속는다. 특히 선거 때면 이런 경향은 더 심해진다. 선거가 끝날 때마다 속았다고 하고, 다음에 속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또 속고 속아서 정치는 믿지 않겠다고 했다가 다시 속는다. 플라톤은 대중을 속이는 정치인과 정치인을 지배하는 자본가, 그들에게 속는 대붕에게 분노했다. 그래서 그는 민주주의를 반대했다.

플라톤은 철인을 길러내려 한다. 엄격한 제도와 교육에 의해서 철인

은 길러지고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탈락된다. 어른에게 물들지 않도록 아이들을 격리해 건강을 위한 체육,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음악교육을 시킨 후 수학, 역사, 과학교육을 시킨다. 20세에 치르는 시험은 매우 어려워 대다수가 탈락한다. 합격한 청년들은 다시 10년간 교육받고 2차 시험을 치러, 합격하면 비로소 철학을 오년동안 배운다. 이후 15년간 실제 생활 속에서 보통의 인간들과 경쟁하며 인생을 배운다. 이렇게 길러진 사람이 초인이고 통치자가 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변화의 신호는 이미 오래전 우리에게 손짓을 했으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변화를 외면하고 개방대신 쇄국을 택했다. 만약 실학이 국가의 담론이 되었다면 일제침략의 참혹한 결과는 없었을지 모른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이탈리아도 마찬가지 였다. 수백 년간 지중해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의 영화는 없었고, 로마교황청,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로 갈기갈기 찢어진 것이 마키아벨리 시대였고 정정이 불안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의문이 있던 마키아벨리는 민주주의가 아닌 군주에 의한 강력한 통치를 추구했다. 그가 보는 민중은 힘의 논리에 좌우되는 변하기 쉬운 존재였다. ‘인간은 두려워하는 자보다 애정을 느끼는 자를 더 쉽게 배반한다. 원래 인간은 사악해 단순히 의리의 기반에 매인 정 같은 것은 자기의 이해에 따라 언제나 서슴 없이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 앞에서는 처형의 공포로 꽉 얽매여 있기 때문에 결코 모르는 체할 수 없다.’


이이의 聖學輯要(성학집요)

聖學은 제왕학을 말하며 조선의 국학인 주자학을 뜻하기도 한다. 성학은 임금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성학집요의 뿌리는 대학으로 스스로 수양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군자의 기본과업을 강조하고 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백성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으로 왕의 덕이 아래에 미치고 아래의 덕이 위에 미쳐 서로가 상응하면 자연히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 그런데 모두가 바라는 살기 좋은 나라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체제를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변해야 한다. 결국 율곡의 이야기는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다.


박제가의 북학의

문화와 문화가 만나면 풍부해진다. 그런 측면에서 외세의 침략은 변화의 기회일수 있다. 멸시의 대상이었던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조선은 변하지 못했고 북방의 오랑캐인 여진족이 중국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했으나 조선은 변하지 못했다. 주자학의 프레임에 갇혀 변화의 동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본 것은 막강한 현재가 아닌 과거 오랑캐와 왜구의 모습만 본 것이다.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답답함, 박제가의 고민은 그곳에서 시작된다.

“지금 사람들은 아교와 옻칠의 껍질에 가려 꿰뚫어 헤쳐 보지 못하고 학문도 속된 껍질에 갇혀 있다. (중략) 나와 친하다 하는 삶도 나를 미더워 하지 않고 제 것을 믿으며, 스스로 나를 미더워하던 사람도 이상한 뜬소문을 듣고 평생 크게 믿던 것을 의심하고 나를 비방하는 자의 말을 믿는다. 나는 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지금 사람은 胡(호)자 하나만으로 중국을 말살하려 한다. 내가 중국의 풍속이 이처럼 훌륭하다고 하면 사람들이 바라던 것과 크게 다르다. (중략) 사람들에게 시험 삼아 ‘만주 사람들은 말소리가 개 짖는 것 같고 음식은 익힌 냄새 때문에 옆에 갈 수가 없으며 뱀을 시루에 쪄 먹고 황제의 누이는 음탕하기 짝이 없다.’ 말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기뻐해 그 말을 전하기에 바쁘다.”

조선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박제가는 당시 지식인들이 외면하던 사실을 말한다. 당시에는 충격적이고 개혁적이었을지 몰라도 박제가의 사상은 삶과 생황을 게선 하고자 하는 실리 사상이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빵집 주인의 이타심 덕택이 아니라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택이다.’ 영국 글래스고 대학의 교수가 당대의 상식을 뒤엎는 도발적인 발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따르던 시절에 이 학자는 이기심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니 이기심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라 하고 공언한 것이다.


국부론은 900여 페이지가 넘는 지면에 방대한 역사적, 지리적 자료들을 담고 있으나, 전개되는 경제이론은 단순하다. 스미스는 책의 서문에서 한 국민의 연간 노동은 그 국민이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 모두를 공급하는 원천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상품가치의 원천이 노동이라고 밝혔다. 이는 국가의 부는 농업과 제조업에 종사하는 생산자, 노동자들의 노동에 달려있다는 사상을 시사한 것이다.

스미스가 왜 이런 명제를 서문의 서두에 밝히게 됐는지,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려면 금이나 은과 같은 화폐를 많이 축적해야 한다는 중상주의에 대한 대결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미스는 중상주의자들의 착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힐난했다.

‘국민이 소비하는 생활필수품을 공급해 주는 것은 얼른 보면 금이나 은과 같은 화폐인 것 같지만, 그게 아니오. 금과 은은 상품을 구입할 때 사용하는 교환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오. 상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요? 바로 농산물을 만드는 농민, 공산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니 한나라의 부는 그 국민의 연간 노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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