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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9. 인간이 그리는 무늬(2)(최진석著, 소나무刊)

인문학은 개인이나 국가의 진정한 ‘독립성’과 깊이 관련됩니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언젠가부터 인문학 열풍이 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인문학이란 놈을 어디에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그 쓸모가 모호하다고 생각하며, 마냥 어렵고 막연하며, 할 일을 하고 난 다음에 여유 있을 때 한번 공부해 볼 만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문학을 하는 목적은 지식을 갖추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문적 활동을 할 수 있는 힘, 인문적 통찰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철학과에 입학했다는 것은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 즉 생각하는 힘을 갖추기 위함으로 힘을 가지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요한 흐름 중의 하나가 인문학 열풍입니다. 한국사회가 드디어 ‘독립적 주체’로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회나 초기 단계에는 정치학과 법학이 중심적인 기능을 하고, 조금 더 발전하게 되면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이 주도적인 기능을 합니다. 조금 더 발전하면 철학, 심리학이 중심학문으로 등장을 하며 이보다 더 발전한 나라에서는 고고학과 인류학이 주요학문으로 부상합니다. 고고학과 인류학을 발전시켰던 나라는 제국을 꿈꿨던 나라인데 인간을 전체적인 의미에서 제국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관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중심이 된다는 것은 문명과 인간의 흐름을 독립적으로 판단하여 미래를 위한 비전과 메시지를 주도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다른 나라에서 정한 비전과 메시지를 학습해서 그대로 수행하거나 모방하는 역할로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메시지를 창조, 선택, 판단하는 정도로 나라의 수준이 올라서야 인문학이 중심적인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문학은 개인이나 국가의 진정한 ‘독립성’과 깊이 관련됩니다. 주도권을 잡으려는 노력의 표현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 한국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세계 속의 한국의 진정한 독립성과 정체성을 확보하고 성장하기 위한 열망이나 필요와 깊이 관련된다고 보는 겁니다.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진입하지 못하느냐의 문제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문학이 중심기능을 하는 사회로 진입하느냐 진입하지 못하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은 오랜 기간 ‘독립적 주체’로서 사고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중국에서 생산된 이데올로기를 중심에 놓고 살았어요. 물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도적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중국의 그것이지요.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의 흐름과 같은 주체적 노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일본식 이데올로기가 전체적으로 강제되어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덕택으로 해방을 맞다 보니 미국적 이데올로기가 최근까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사회변혁 운동도 이론적 근거는 마르크스 레닌이즘, 해방신학, 마오이즘, 프랑크푸르트학파같이 외부에서 온 것들이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에 우리 자체의 토양에서 생산된 우리 스스로의 이론을 기반으로 삼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은 주도적인 것이든 저항적인 것이든 간에 모두 큰 틀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들임에 틀림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구체적 토양에서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 갈수 있는 스스로의 사상을 아직은 건립하고 있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 대학에서 생산하고 있는 철학박사 학위는 대개 ‘무엇 무엇에 관한 연구’로 자기의 세계관을 피력한 것이 아닌 외국 사람이 주장하는 세계관을 분석하고 해석한 것뿐입니다. 우리나라가 자동차를 생산하지만, 자동차라는 장르를 시작하지는 못했습니다. 서양에서 자동차라는 장르를 만들면 우리는 그대로 따라 합니다. 전기밥솥을 만들지만, 전기밥솥이라는 장르를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일은 산업현장뿐 아니라 사회 제도적인 측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고안되고 처음 시작된 것이 없고 외국 것들을 모방한 것입니다. 학계에서 ‘한국의 철학이 아직 건립되지 못했다.’ 표현하듯 산업현장에서도 아직 장르를 개척하지 못하고 생산자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창의의 기운을 통해서만 질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전진하며 튼튼해 질 수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한국사회 전반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을 가장 중요한 화두로 제기합니다. 그런데 상상력과 창의성은 어디에서 공급되나요? 바로 인문학적 토양에서만 가능한 작업입니다. 선진국이 만든 비전을 따라 하는 ‘이류의 삶’에서 스스로 문명의 방향을 판단하고 스스로의 비전을 창조할 수 있는 ‘일류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인문학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USA TODAY 조사에 따르면 미국 1000대 기업 CEO 중 경영학 관련 전공자는 1/3이 되지 않아요. 대개는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며 심지어 조지 소로스는 철학자 칼 포퍼의 제자였어요. 왜 인문학 출신이겠어요? 별다른 이유 없습니다. 인문학 출신들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 출신이라야 변화의 흐름에 부합하는 정확한 의사결정을 하여 돈을 더 잘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인문학 열풍을 주도하는 그룹은 놀랍게도 학자들이 아니라 기업가들입니다. 제가 보기에 기업인들은 직감적인 감각이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기업가들은 자신의 판단이 사업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압니다. 순식간에 흥하고 순식간에 망하기에 항상 긴장해 있고 예민함이 살아있습니다. 생존하기 위한 감각과 촉이 살아있는 기업가들이 인문학에서 기업생존을 모색하고 있는 것인데 기존의 외국산 비전과 메시지에서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감각과 촉을 인문학으로 이야기하면 바로 통찰력이며 통찰은 질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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