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77. 인간이 그리는 무늬(1)(최진석著, 소나무刊)

저기, 사람이 내게 걸어 들어오네.

by 물가에 앉는 마음

* 3~4년전 읽어 본 책 중 최고라고 생각해 지인들에게 선물로 보낸 책이다. 2022 대선에 참여한 저자에게 약간 실망했지만 좋은 책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책의 광고 카피가 ‘버릇없는 인문학 강의’, ‘우리’는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 오직 나의 욕망에 집중하라! 인데 아들러의 향기가 풍긴다.

GT정비기술센터 2018-5월 Talk Concert의 주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였다. ‘객관을 유지하려 해도 결국 사람은 주관이 객관을 뛰어넘으며 살게 되지만, 사회적 동물이므로 객관을 유지하려 노력해야 하며 조금은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뿐인 삶이니 누구를 위해 사느냐? 가 아니라 당연히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내용인데 이것도 아들러의 말을 인용해서인지 이기적인 냄새가 진하게 느껴진다. Talk Concert 원고를 정리하다가 비슷한 광고카피가 보이기에 책을 집어 들었다.


프롤로그: 저기, 사람이 내게 걸어 들어오네.

YG의 양현석씨의 인터뷰 기사 ‘남들이 나를 2000억 부자라 하지만 2조 원이라고 만족할까? 삶에서 보람된 일이 뭘까? 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필요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하지 않았다. 90년대 힙합을 하는 지누션과 원타임은 돈이 되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음악이어서 대중과 나누고 싶었다. 즐겁기에 음악을 만드는 것이지 억지로 돈을 벌려고 앨범을 낸 적은 없다.’ 크게 성취한 사람들은 대개 이런 투로 이야기합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의 성공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음악이어서 대중과 나누고 싶었다.’ 이 한 구절이 양현석 대표를 있게 한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모두가 가치 있다고 믿는 사회적 합의를 추종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집중합니다. 이미 정해진 프레임을 근거로 소소하게 따지고 계산하는 사람은 크게 성취하지 못합니다. 모든 큰 성취는 새로운 프레임에 대한 기대로부터 나오는데 창조적이라는 것입니다. ‘매트릭스’의 감독으로 유명한 워쇼스키 남매도 대학 자퇴 후 목수 일을 잠깐 했고 굶어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극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대학은 졸업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단 직업을 갖고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에 굴복했다면 위대한 감독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마음속에서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비밀스러운 내면의 충동을 억누르면서 자신을 줄여나가면 ‘사람’이기 어렵습니다.


경지 정리가 잘된 땅에서 누구나 심으려고 하는 작물을 심고 남들보다 더 잘 되기만을 바라는 요행심을 갖는 것보다. 측량도 안 된 황량한 들판에 서서 땅과 자신의 관계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고민하는 우직한 자.

자와 컴퍼스로 그려진 설계도에만 의지하는 것보다 집 지을 땅 위에 서서 바람의 소리를 따르며 태양의 길을 살펴 점 몇 개와 말뚝 몇 개로 설계를 마무리할 수 있는 자,

외국 철학자들 이름을 막힘없이 들먹이면서 그 사람들 말을 토씨 하나까지 줄줄 외우는 것보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자기 말을 해보려 몸부림치는 자,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현실에서 이념을 새로 산출해 보려는 자,

믿고 있는 것들이 흔들릴 때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자,

이론에 의존해 문제를 풀려 하지 않고 문제 자체에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자,

봄이 왔다고 말하는 대신에 새싹이 움을 틔우는 순간을 직접 경험하려고 아침 문을 여는 자,

들은 말을 여기저기 옮기지 않을 수 있는 자,

옳다고 하더라도 바로 행동하지 않고 조금 더 기다려 볼 수 있는 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체계를 뚫고 머리를 내밀어 볼 수 있는 자,

호들갑스럽지 않고 의연한 자, 기다리면서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는 자,

해야 할 무엇보다 하고 싶은 무엇을 찾는 데 더 집중하는 자,

십여 시간이 넘는 비행 여정에서도 내릴 때까지 시계를 한 번도 안 볼 수 있는 자,

아는 것에 제한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근거로 모르는 것으로 넘어가려 하는 자

이성으로 욕망을 관리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욕망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는 자

나를 우리 속에서 용해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는 자

모호함을 명료함으로 바꾸기보다는 모호함 자체를 품어버리는 자

자기 생각을 논증하기보다는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자

남이 정해 놓은 모든 것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자

편안한 어느 한 편을 선택하기보다 경계에 서서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자


바로 이런 자들이 ‘사람’입니다. 이성이 아니라 욕망의 힘이 주도권을 가진 것이지요. 그런 자가 내 작은 정원의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올 때, 저는 비로소 공간에 갇힌 시간이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으며 나지막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기, 사람이 내게 걸어 들어오네.’


에필로그: 욕망으로 새기는 인간의 무늬

욕망은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최전선이며 삶의 무늬는 죽으나 사나 ‘나’의 무늬이어야 합니다. 평생 계율을 지키며 용맹정진하여 득도한 스님이 있습니다. 득도한 눈으로 보니 계율도 책도 언어도 참 부질없고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족쇄일 뿐입니다. 그 옆에 새끼 중이 보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보기에 수행하는 일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고 득도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기도 한데 계율을 지키기가 여간 버거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과정을 생략하고 큰스님을 따라 계율도 책도 언어도 버리고 득도한 척합니다. 큰 스님이 계율을 버린 일과 새끼 중이 계율을 버린 일은 차원이 다릅니다. 새끼 중처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헛 똑똑이로 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핏발 선 눈동자를 가지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욕망을 지키는 자, 덕을 잃지 않은 자는 묵묵히 고행의 길을 감당합니다. 나를 천한 곳에 있도록 방치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를 보지 않습니다. 나를 호되게 다루지 않고 조심조심 격려하고 사랑하고 보듬어 줍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을 남겨 둡니다. 칙칙하지 않습니다. 밝고 환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591. 도서관 옆 철학카페(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