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옆 철학카페(2) (안광복著, 어크로스刊)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물어야 할 것들
번듯한 직장만 얻으면 근심이 사라질 것 같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하지 않다. 산 너머 산이고 삶은 버겁다. 직장을 옮기기도 두렵고 새로운 직장이 낫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출근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망치로 묵묵히 내려치는 듯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쳇바퀴 같은 일상, 어느새 나는 하루 종일 퇴근시간만 손꼽게 되었다. 남들은 내가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내게는 속 모르는 소리로 다가올 뿐이다. 바쁘게 총총 뛰어다녀도 마음 한 구석은 늘 헛헛하다. ‘과연 나에게 미래가 있을까? 이 힘겨운 생활은 언제쯤 끝날까? 차라리 직장을 옮겨볼까?’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의 욕구를 ‘성장의 욕구’, ‘소유의 욕구’ 둘로 나눴다. 직장 분위기가 성장 욕구를 따르고 있는가? 소유 욕구에 따라 굴러가는가? 봉급 빼고는 일터에서 의미를 찾기 어려운 사람에게 직장 생활은 고민이다. 남이 내 몫을 차지하면 내 수입이 줄어드니 더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다. 야근과 과로가 미덕으로 다가오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일하는지 일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구분이 안 된다. 이쯤 되면 우리의 직장 생활이 왜 헛헛한지 분명해 보인다. 반면 성장의 욕구로 가득 찬 일터는 즐거움이 넘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경쟁이 치열하니 남보다 더 달려야 하는가? 나만 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불행한 사회에서는 누구도 행복하기 어렵다. 반면 모두가 행복한 사회에서는 불행해지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아득바득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사회를 어떻게 하면 낫게 만들 수 있는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좋은 직장을 얻어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은가?’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 일자리를 얻을까?’를 물어서는 안 된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부터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물론 꿈꾸기조차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러나 세상의 미래는 용감하게 꿈꾸는 젊은이들 손에 달렸다.
나이 먹기가 두렵지 않으려면(행복할 권리)
‘일자리를 구할 때, 몇 년생 이후 출생자’라는 문구가 신경 쓰이고 육체적 매력도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낄 때 늘어나는 나이가 무서워진다.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더 이상 나에게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내 인생은 이대로 주저앉고 마는 것일까? 그러나 에세이스트 Michael Foley에 따르면, 나이 먹는다 해서 우리 삶이 초라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늘어나는 나이는 인생에 주어지는 축복이다.
세상살이가 힘겹게 느껴지는 까닭은 세 가지 믿음 탓이다. ‘난 성공해야 하고’, ‘누구나 내게 잘 대해주어야 하며’, ‘세상은 반드시 살기 쉬워야 한다.’는 기대 말이다. 하지만 인생이 마음대로 흘러가던가. 세상은 우리에게 ‘성공보다 실패하는 일이 더 많음’을, ‘내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세상살이는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곤 한다. 공자가 말한 지천명이란 내 삶을 힘들게 했던 세 가지 믿음을 내려놓는 경지이다.
미국 경제학자 Richard Easterlin이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그대들 삶에 무엇이 있으면 행복하겠냐?’ 16년 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머쥔 그들에게 다시 물었다. ‘이제 무엇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겠냐?’ 그들은 많은 것을 이뤘지만 여전히 조바심을 내며 TV, 자동차에서 해외여행, 별장 등으로 수준만 높아졌을 뿐이다. 성공과 성취는 삶에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더 많은 욕구만 틔워 놓았을 뿐인데 이스털린 역설(Easterlin‘s Paradox)란 성공을 이루고 소득이 늘어도 행복감이 늘지 않는 모습을 말한다. 이룬 게 없어도 주눅 들 필요가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으며 몸과 정신이 성장하듯 성인들도 중년의 위기와 50대의 갱년기를 겪으며 완숙해진다. 사람들은 오늘보다 내일을 발전하고 나아진 미래를 그리며 희망을 품으나 나이가 먹을수록 미래는 희망보다 걱정으로 다가온다. 머리도 체력도 예전 같지 않은데 세상은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고 경쟁자들은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나만 세상에서 밀려나는 것 같다. 하지만 Michael Foley에 따르면, 이렇기 때문에 나이 듦은 되레 축복이 된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젊은이를 보면서 세상은 혀를 차고 더 열심히 해보라고 다그치기도 해 젊은이들은 더 미칠 지경이다. 해도 안 되는걸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나이든 사람에게는 주위의 기대는 사라지고, 강박감도 줄어든다. 세상과 어울려야 한다는 의무감도 줄어든다. 나이 먹고 밀려날수록 세상이 원하던 삶 대신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찾아갈 가능성은 높아진다. 일도 즐기게 되는 경우가 늘어난다.
많은 나날이 남아 있다고 여길 때는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모른다. 새털같이 많은 날들, 하루를 대충 보냈다 해서 그리 큰 문제가 있겠는가? 하지만 죽음이 멀지 않다고 느낄 때는 더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느낄 때 주어진 시간은 훨씬 강렬하고 의미 깊게 다가오는 법이다.
물론 나이 듦의 지혜는 저절로 길러지지 않는다. 주변에는 나이를 허투루 먹어 젊은이보다 탐욕스럽고 사랑과 관심을 끝없이 갈망하며 영원히 죽지 않으려는 듯 나이 드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외면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쌓이는 세월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3S, 고독(Solitude), 정적(Stillness), 침묵(Silence)이다. 젊은이들은 현재에 살기 힘들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고 여긴다. 반면 나이든 이들은 과거를 곱씹으며 현재를 날려버리곤 한다. 현명하게 나이든 사람만 오롯이 ‘현재’를 누린다.
삶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어울리며 시끄러운 가운데만 있지 않다. 현명하게 나이든 사람은 세상의 무관심과 고독을 도리어 ‘자기만의 시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런 능력은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습대로만 살려했던 이들은 자기의 욕구를 기르기 어렵다. 이런 자들은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스스로 모르는 탓이다. 그래서 자신을 내치려는 사회를 끝없이 원망한다. 하지만 고독과 정적, 침묵 속에서 틈틈이 세상과 거리를 두며 ‘나이 듦’을 연습한 사람들은 다르다. 무엇이 자신다운 모습인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자신다운지 끊임없이 되물으며 찾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