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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 도서관 옆 철학카페(1)

도서관 옆 철학카페(1) (안광복著, 어크로스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저자의 말

‘모든 이해는 오해다.’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철학교사인 내게 이 말은 구원과 같았다. 잘 만들어진 전투매뉴얼도 실전에는 도움 안 되는 경우가 흔하다. 목숨이 오가는 1차 세계대전에서 병사들은 규정대로 대검을 쓰지 않고 야전삽을 들고 싸웠다. 병사들은 싸우며 위력적인 무기와 전투방법을 스스로 찾아냈다.

철학교사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금융위기나 테러 등의 큰 문제보다 내 발톱에 박힌 가시가 절박하게 다가온다. 현실에서 철학의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 무척 많다. 어려운 취업과 나락으로 떨어지는 내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더 이상 노력만으로 세상을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이 나를 감쌀 때 나는 어떻게 미래를 꿈꿔야 할까 상처만 안기는 가족을 사랑할 힘을 어디서 구할까 등등. 이러한 고민에 ‘책으로 익힌 철학’은 별 도움이 못 된다. 우물은 목마른 사람이 파는 법이니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지혜를 빚어내야 한다.

도서관에서 공들여 고른 35권의 책을 소개한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문제들에 맞게 창조적으로 읽고 새롭게 풀어쓴 것으로, 소개된 내용은 네이버캐스트 ‘성장을 위한 철학 노트’의 원고를 모은 것이다.


인생이 초라하게 느껴진다면(수상록),

‘요새 뭐하니?’

두려운 질문이다. 추석, 설날같이 친척이 모이는 날은 더 그렇다.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자꾸만 주눅이 든다. 취업은 늘 준비 중이거나 일자리가 있다 해도 변변치 않다. 그나마도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겠다. 결혼은 또 어떤가. 사귀는 사람을 남들 앞에 소개하기가 자꾸만 저어된다. 그나마 만나는 이조차 없을 때의 서글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속도 모르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어댄다. ‘요새 뭐하니?’, ‘취직은 언제?’, ‘결혼해야지?’, 질문 받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아무도 안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친척이나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를 피하게 된다.


이런 걱정에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혀를 찬다. 도대체 왜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나를 비웃을 것 같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 과연 그들은 존경할만한 인물인가? 비꼬는 말로 내 마음에 상처만 안기는 삐딱이들 일뿐이다. 당신은 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왜 그들에게 인정받으려 하는가?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도 다르지 않다. 몽테뉴는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내 건강과 생활에만 관심이 있다. 이 밖에는 그 어떤 것을 놓고도 수고롭게 고민하지 않는다.’


사람 됨됨이는 큰일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 곳곳에서 두드러진다. 유명인사도 정작 지인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경우가 있다. ‘기본이 안 되어있다.’, ‘경우가 없다.’ 이런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이들은 본 모습이 알려질까 봐 늘 안절부절못한다. 부실한 일상이 세상의 평가에 매달리게 하는 꼴이다.

건실하고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삶에 당당하다. 부자이나 생활이 엉망인 아버지와 가난하지만 사랑 깊은 아버지를 견주어보면 부자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지갑으로 여겨질 뿐이며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관계가 허물어진다. 우정도 사랑도 쌓지 않은 채 높은 자리만 차지한 자들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지위에서 밀려나면 그들은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인생은 배배 꼬이고 신산스러워야 제 맛이다. 문제와 도전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삶은 의미심장하게 불타오른다. 그래서 몽테뉴는 두려움 없이 세상에 도전하라고 말한다. 또한, 다른 충고도 놓치지 않는다. ‘우리 영혼의 뛰어남은 위대한 일에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에서 드러난다.’ 내 삶이 되었는지는 다른 사람이 평가하지 않는다. 남들이 나에게 박수를 치건 비난을 하건, 그들은 결국 자기 삶으로 돌아간다. 내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은 내 자신이다.


‘나는 젊어서 남들에게 자랑하려고 공부했다. 그 뒤에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했다. 지금은 재미로 공부한다.’


자존감도 연습해야 한다. 자기 생활에 충실하며 주변에 도움 되도록 늘 애쓰는 사람은 세상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양심’이 삶의 자부심을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반면, 남들에게 인정받는 데 삶의 목적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영 벗어나지 못한다.

‘그대는 자랑하기 위해 사는가. 자신의 만족과 재미를 위해 사는가?’ 몽테뉴의 충고에 귀 기울일 이다.


이를 악물고서라도 용서하라(우리는 어쩌다 적이 되었을까?)

절절한 사랑은 종종 뜨거운 증오로 바뀌곤 한다. 그이에게 다른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 마음은 순식간에 지옥이 된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지?’ 설레게 했던 사랑은 미칠 듯한 증오로 변하고 그를 파멸시키고픈 열망이 솟는다. 이처럼 사랑과 증오는 똑같은 대상에 대해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분노를 품고 살아봐야 자신만 손해다. 상대를 용서하고 놓아버려야 한다. 상대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히는 한 내 삶은 상대에게 묶여있다. 제대로 살기 어렵다는 뜻이다. 내게 상처 준 이가 나와 같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서로가 제대로 된 삶을 꾸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 다 바람직하지 않기에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서로에게 이롭다.

용서는 화해와 다르다. 화해는 나 혼자서 할 수 없다. 그러나 용서는 혼자서도 가능하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다. 내가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겠다고 결심하면 그만이다. 물론 용서가 말처럼 쉬운가. 머리로는 용서한다 해도 가슴은 여전히 답답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분노가 솟구쳐도 이를 악물고 용서해야 한다.

근육은 훈련을 통해 강해지며 영혼도 다르지 않다. 거듭하여 용서를 “연습”할수록 내 영혼은 풍요로워진다. 간디, 만델라 같은 이들은 평생 박해에 시달렸으나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증오하지 않았다. 용서하면 할수록 영혼은 점점 맑고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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