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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1)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1) (진중권著, 창비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717.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1) (진중권著, 창비刊)


얼마 전 유명 강사가 TV인문학강연에서 엉뚱한 사람의 작품을 장승업의 작품으로 소개하는 실수를 했다. 이를 계기로 출판과 방송시장에 부는 인문학 바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세간의 인문학은 진정한 인문학이 아닌 장터의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진짜 인문학’과 ‘가짜인문학’의 기준은 무엇일까?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만은 진짜 철학자라 굳게 믿었지만 남들 시각은 달랐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말장난으로 먹고사는 소피스트로 표현했다. ‘인문학은 얇은 지식이 아니라 깊은 성찰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지혜를 상품으로 팔아먹던 사이비철학자 즉 소피스트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켰듯 기준은 모호하다.

컴퓨터작업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다. 기계어로 하는 작업, C언어로 하는 작업, 매뉴얼로 하는 작업이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자기 층위에 맞는 인문학을 하면 된다. 인문학적 성찰은 어느 층위에서도 가능하다.


인문학의 위기와 디지털시대

얼마 전 독일을 갔더니 고전문헌학과가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만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인문학의 위기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은 굉장히 오래된 현상이죠. 고대그리스에서는 필로소피아(philosophia)가 지식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었는데 고대인들이 피지카(physica)라 부른 자연과학이 떨어져 나가며 남은 분야를 메타피지카(metaphysica)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부분을 철학이라 부르는데 사실 고대의 철학적 사유의 범위는 매우 넓었습니다. 오늘날의 인문학은 물론이고 사회과학에 속하는 영역도 포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근대이후 지식의 분업화를 통해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에 속하는 분야도 철학에서 떨어져 나가고 20세기 철학은 거의 언어분석으로 한정되기에 이릅니다.

이론(theory)의 어원은 그리스어 테오리아(theoria)입니다. 테오리아란 육체가 아닌 ‘정신의 눈’으로 변화무쌍한 현상들 속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세계의 근원적 원리를 조용히 바라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근원적 원리를 아르케arche라 부르죠. 가령 플라톤에게 아르케는 이데아(idea)였고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라고 생각했죠. 이렇게 실용적 활동에서 벗어나 정신의 눈으로 조용히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 바로 테오리아, 즉 觀照(관조)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테오리아에 몰두하는 삶을 스콜라(schola)라고 불렀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콜라를 최고의 여가로 여겼습니다. 철학을 최고의 여가활동으로 여겼으니 참 좋은 시절이었죠. 물론 이 자유는 타인의 희생 즉 노예제도 덕분이었습니다. 물질적 필요에서 해방되어 운동과 목욕으로 신체를 돌보거나 정치나 철학으로 영혼을 배려하며 살 수 있었던 거죠.

인문학을 보통 자유교양이라 합니다. '자유롭다'라는 말은 먹고 사는 활동에서 자유로운 기술과 기예를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었죠. 노예와 하층민들의 영리활동은 육체노동을 동반한 천박한 활동이라는 편견이 깔려있긴 합니다. 아무튼 자유교양이란 원래 생업과 관계없는 고상한 정신노동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문리대, 한때 대학의 핵심이었습니다. 문과에서는 문학, 사학, 철학 이과에서는 수학, 물리학, 천문학처럼 영리나 기술하고 아무 관계없는 순수학문이 대학의 중심이었습니다만 최근에는 문리대라는 말이 없어졌습니다. 인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계도 수학과 물리학은 찬밥신세입니다. 이과하면 공대, 문과하면 경영대 즉 돈 버는 학과가 대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학문이 영리활동과 결합하는 것은 20세기의 현상입니다. 사실 산업혁명시기만 하더라도 과학은 아직 실용성이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은 학자들의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증기기관을 만든 제임스와트는 대학교수가 아닌 탄광노동자였습니다. 20세기 중반 과학혁명이 일어나며 과학이 기술의 동료가 됩니다. 觀照를 뜻하던 테오리아가 세속화하여 이론이 되더니 최근에는 ‘제작의 노하우’로 변해버린 겁니다. 오늘날 제작과 관계되지 않는 순수이론은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습니다.

과학혁명, 정보혁명이후 대학은 본격적으로 산업과 결탁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산학협력이죠 하지만 말이 협력이지 주도권은 어디에 있는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업은 대학에 맞춤형인재를 요구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기업이 대학을 인수합니다. 대학이 기업에 종속되어 전교생이 교양으로 회계를 배우는 사태도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교육부에서는 인문학을 지원하는 자금을 지원하는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문학 정원을 반으로 줄이라는 겁니다.

인문학을 배우는 학생이 줄면 교수가 줄고, 교수가 담당하는 영역이 넓어지며 깊이가 얕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은 이렇게 거시적인 사회변동에서 유래합니다. 영리활동과 직접 연결되지 않은 순수 학문들이 가치가 평가 절하되어 사라져가는 것이죠. 아마도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직면한 ‘인문학의 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일 겁니다.


문자문화의 종언

미디어 이론의 시각에서 보자면 인문학은 문자문화의 대표이자 구텐베르크 혁명의 총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자문화와 인쇄술이 결합하며 많은 사람들이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죠. 우리가 오늘날과 같은 논리적인 사유, 이성적인 사유를 갖게 된 것은 인쇄술 덕분에 문자문화가 모든 계층으로 확산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문자문화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이 이미지와 사운드로 정보를 전달한 이래 정보는 더 이상 읽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걸 보고 맥클루언은 문자문화의 시대는 끝났다고 건언한 것이죠.

요즘 젊은이들은 좀처럼 책을 읽지 않습니다. 정보전달 플랫폼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은 사상서적을 읽었지만 요즘은 팟 캐스트를 듣죠. ‘나는 꼼수다’, ‘노유진의 정치카페’ 등등

예전 컴퓨터는 타자기, 계산기였는데 영상매체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소통방식도 글에서 이미지 한 컷으로 끝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인문학을 한다고 해도 읽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인문학의 위기’는 플랫폼 변화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지요.

매체가 의식을 재구조화 합니다. 문자로 의식을 구성한 사람과 영상으로 구성한 사람은 사고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문자세대는 세계를 알고 싶으면 책을 읽고, 정보를 앞에서 뒤로 선형적으로 수용하죠. 문자세대는 선형적 시간관념에 따른 역사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의 비가역적 흐름 속에서 역사적 시간의 의미를 찾지요. 선형적, 역사적, 계몽적 의식을 가진 우리세대는 책으로 배운 우리가 민중을 계몽하여 함께 더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생각이죠. 우리에게 히스토리인 것이 젊은 세대에게는 스토리입니다. 히스토리는 역사왜곡을 경계하는 반면 이야기에서는 참, 거짓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과거에는 거짓말하면 나쁜 놈이라 불렀는데 요즘 나쁜 놈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루한 사람입니다. 거짓말이라도 재미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적’의식과 구별되는 젊은 세대의 ‘서사적’의식입니다.

영상세대는 시간에 대해서 비선형적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구세대는 극장 개봉을 놓치면 영화를 못 봤지만 요즈음은 손끝만 움직이면 과거를 되돌려 무엇이든 볼 수 있습니다. 비가역적이었던 시간이 클릭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이다보니 외과의사가 조선시대로 들어가는 황당한 설정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거죠.


인문학 독서인구 감소원인은 여러 개이나 그중 하나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책이 세계요 진리라고 믿었고 출간되는 거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비슷한 책이 수 십 권 나옵니다. 예전에는 한권만 읽어도 ‘세계를 알았노라.’ 생각했는데 다른 이야기를 하는 책들도 쏟아져 나오니 책 속에 든 것이 진리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 속에 든 것이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가능한 해석이라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진리도 아닌 것을 읽어야 하나, 왜 굳이 돈 주고 사야하나 근본적인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죠.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정보를 말과 그림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죠. 이미지와 사운드로 소통하던 시절의 의식이 디지털기술에 힘입어 더 높은 차원에서 복귀하고 있는 겁니다. 문자문화 이전 사람들을 지배했던 구술적 의식, 즉 신화적, 설화적, 환상적 의식이 첨단기술과 결합해 다시 나타나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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