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 버킷리스트 한 줄을 지우면서

‘자잘한 행복’, ‘자잘한 희망사항’

by 물가에 앉는 마음


연초, 10년간 준비 했던 작업을 끝냈다. 글 쓰는 연습을 시작해 퇴직 전 회사 이름이 들어간 책을 만들겠다는 버킷리스트 한 줄을 이제야 지웠다. 내가 원해서 시작했고 하고 싶었던 일이었지만 묵은 숙제를 끝낸 것처럼 여간 개운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강박감이나 의무감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개운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전KPS에서 보낸 편지’, 회사명이 들어간 책을 발간한 것에 만족한다. 10년간 준비했다고 하나 대부분 기간은 글쓰기 연습 기간이었으므로 질적 완성도가 높은 책은 아니다. 아직까지 끄적거린다는 표현으로 대신하고 있기에 글 쓰는 수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려 하고 평가도 사절하겠다. ‘문학상 수상’이나 ‘10만부 판매’ 등의 목표를 설정해 놓지 않았기에 질적 수준을 신경 쓰지 않았다는 말은 변명이란 것을 알기에 솔직하게 굳이 평가 가치가 없을 것이라 고백한다. 대신 수준을 평가하지 말고 준비과정을 봐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어릴 적 별명이 사오정인 작은 아이에게 배운 것이 있다. 작은 아이가 고등학생시절 공부하는 시간과 성적이 비례하지 않자 ‘결과만 보지 말고 열심히 공부했던 과정을 봐 달라.’했듯 나도 ‘글의 수준을 보지 말고 10년간 준비하고 발간했던 과정을 봐 달라.’하는 것이다.


아쉬움이 있었는지 버킷리스트 한 줄을 지우자마자 제대로 된 또 한권의 책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만년필을 갈고 닦아 마음을 가다듬은 후 내 자신에게 물어보려 한다. ‘준비는 했나? 자신은 있고?’ ‘두 번째 책 만드는 작업이 행복할 것 같아?’. 사실 아직 지우지 못한 버킷리스트가 많기에 당분간은 그것을 지우는데 치중하려 한다. 불현듯 어느 날 죽기 전 두 번째 책을 만들어야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한 번 책을 묶으려 한다.

버킷리스트중의 한 줄을 지웠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어쩌면 가장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항목이었으나 나를 35년간 지탱하게 해준 회사를 위해 퇴직 전에 발간했으니 시기는 적정했던 것 같다. 버킷리스트에는 남아 있는 것이 많으나 남들이 보기에는 큰 것은 없고 자잘한 것들이 남았다.

- 집사람과 1달간 해외여행 가기

- 여수, 통영에서 살아보기

- 50Cm짜리 붕어 잡기

- 인문학 공부 10년 더 하기


후배님들에게 ‘자잘한 행복’을 찾고 ‘자잘한 희망사항’을 버킷리스트에 적으라고 권하지만 가끔은 ‘추구해야할 목표’같이 큼지막한 놈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남아있는 내 버킷 중 ‘50Cm짜리 붕어 잡기’는 죽기 전 달성 불가능할 수도 있다. 50년 넘게 낚시를 했는데도 40Cm에 근접한 붕어를 한 마리 잡았을 뿐이며 50Cm이상은 우리나라 전체에서 1년에 한 마리정도만 잡힐 정도다. 죽기 전에 버킷리스트를 지우려면 눈높이를 낮춰 41Cm, 또는 45Cm로 해야 하나 잡지 못하면 어떠랴, 잡겠다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고 이루지 못하는 것도 있는 것이 인생이기에 41Cm나 45Cm로 낮추지 않으려 한다. 시간 나면 낚싯대를 드리우고 꿈이 50Cm었지 하는 생각만 있다면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스님들이 평생 佛法을 배우고 익히고 행해도 속세의 시각으로는 法力만 높을 뿐 成佛이 되지 못한다. 茶毘式 후 사리가 나와야 도력이 높고 비로소 성불했다는 속세의 시각으로 보면 살아 있는 生佛은 없다. 하지만 내 시각으로는 그분들은 이미 출가했을 때부터 성불이 되신 것이다. 정진하신 스님들 몸에서 사리가 나오지 않았다 해도 부처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셨을 테니 이미 부처님이 되었으나 우리는 우리 주관대로 잣대로 들이대어 세상을 재단한다.

같은 맥락으로 10년 안에 회사 이름이 들어간 책을 만들어 보겠다는 희망사항을 버킷리스트에 적음과 동시에 나는 이미 등단한 것이고 10년 안에 책을 출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속세의 그들이 집을 나온 순간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스님이 되신 것이고 부처가 되었고 성불이 되어 입적한 것같이 원하고 희망했던 버킷리스트들은 생각하고 한 줄로 쓰는 순간 달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두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 인간적이고 현실이 그렇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새삼 생각난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생전의 버나드 쇼가 나태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해학 넘치는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기 전에 해야 할 것이 많으니 부지런히 행해라. 생각이 있으면 시간 끌지 말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우물쭈물 시간만 끌다가는 내 옆에 묻히게 된다.’

해 볼 것 다 해보고, 먹을 것 다 먹어보고, 구경할 것 모두 구경해서 이제는 여한이 없다며 죽는 사람이 있을까 한다. 돈 많은 재벌도, 지위 높은 왕도 해 볼 것, 먹을 것, 구경할 것이 적혀있는 버킷리스트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버킷리스트를 본 적이 없지만 재벌이나 왕들도 분명히 지우지 못한 리스트가 있었고 우물쭈물하다가 묘지에 묻혔을 것이다.


생각대로 된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는데 영국수상 마거릿 대처 아버지도 그러셨다. ‘생각을 조심해라. 생각은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말은 행동이 된다. 행동은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고 너의 미래가 될 것이다.’ 어릴 적 생각이 대처를 수상으로 이끌었듯 생각이 중요하고 생각을 뒷받침하는 행동은 더욱 중요하다.

‘집사람과 1달간 해외여행 가기, 여수 통영에서 살아보기’등 내 생각이 적힌 버킷리스트는 이미 실행되기 시작했고 불가능에 가까운 ‘50Cm짜리 붕어 잡아보기’도 대물붕어에 걸 맞는 낚싯줄과 스토퍼등 장비를 구매했으니 착수되었다. 생각이 있다면 완벽하고, 넘치고, 이익볼 때 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조금은 모자란 듯, 부족한 듯, 손해 보는 듯해도 주저 말고 시작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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