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1) (이어령著, 김태완역음, 열림원刊)
메멘토 모리는 제 일생의 좌우명이 된 말로 죽음을 생각하라는 라틴 어입니다. 저는 여섯 살 때 이 말을 몸 전체로 느낀 적이 있어요. 어른이 되어 그 느낌이 메멘토 모리라는 사실을 알고 시를 발표했죠.
암 투병 중 기자가 찾아와 이병철 회장이 죽음에 대면했을 때 신부님들에게 종교와 신과 죽음에 대해서 스물네 가지 질문을 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죽음에 당면해 병마와 싸우는 이 선생 입장에서 답변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엷은 미소가 입술을 스쳤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어요. 이 회장은 저와는 감히 겨룰 수 없는 세계적인 유명인사이고, 세상사에 대한 통찰력, 지식, 지혜 등 많은 경륜을 쌓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미소를 띨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메멘토 모리분야에서는 제가 대선배라는 자부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회장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엄청난 능력과 경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그 신부님이 제가 존경하던 정의채 몬시뇰이었다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감히 제가 끼어들 자리가 없는데 제의에 대한 수락이 이미 월간조선에 통보된 뒤의 일입니다.
때마침 코로나로 모든 한국인, 아니 전 세계 인류가 이병철회장이 던졌던 스물네 가지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입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이 코로나 펜데믹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과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대담자: 온 지구가 코로나 펜데믹으로 대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종교가 현실적으로 구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으시는 지요?
이어령: 이 불행 속에서도 우리는 오늘날 모든 현대인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여러 종교적 가치와 구제를 찾게 되었다고 봅니다.
첫째로 인간의 능력으로 쌓아올린 문화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가를 봤습니다. 쓰나미로 한 도시가 사라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우리는 인간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지 봤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생존의 수단 때문에 생명의 귀중함을 모르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각국의 차이를 GDP 숫자로 보여주었지만 이제는 코로나 환자수와 사망자수로 바뀌었습니다. 전 인류가 이 세상 모든 가치 가운데 생명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인간은 죽는 존재이면서도 자기가 죽는 것을 잊고 살아온 겁니다.
셋째로, 특히 기독교 국가와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유럽은 물론 한국에서도 많은 시련을 겪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꼭 중세시대 페스트로 인해 기독교 기반이 흔들리던 때와 같은 위기를 맞이했다고 봅니다.
대담자: 그렇다면 제기된 세 가지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듣고 싶습니다.
이어령: 저는 그것을 코로나 패러독스라 부릅니다. 코로나는 왕관이고 예수님과 천사들 뒤에 원처럼 비치는 원광입니다.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성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천사들의 것이지요. 이름부터가 익살맞지 않습니까? 어떻게 모두가 성스럽고 우러러보는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죄악의 펜데믹이 되고 가장 기피의 언어가 되었을까요.
코로나로 인해 대재앙을 겪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대역병이 지나면 인구도 불어나고 이전보다 번영이 이루어졌습니다. 페스트도 그랬고요. 런던인구 3분의 1이 희생당한 1665년 페스트이며 다음해 대화재가 일어납니다. 그 이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비롯해 쟁쟁한 지식인의 활동과 산업혁명, 그리고 팍스브리태니카로 영국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왔어요. 그뿐 아니라 페스트의 종착지인 파리도 페스트가 지나간 후 유럽문화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이것이 펜데믹의 패러독스입니다.
저는 이 패러독스의 마지막이 기독교라고 생각해요. 불신 받고 쇠퇴해가는 기독교에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고 인간의 오만과 그로인한 재앙을 극복했던 그 힘을 되살려내는 희망입니다. 기독교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흔한 말로 위기는 기회로 기독교가 핍박받는 것은 늘 있어왔습니다. 교회는 지금도 코로나를 옮기는 온상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핍박을 받는 거지요.
대담자: 화제를 좁히면 인간의 오만과 코로나 패러독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을 거 같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를 한 몸에 지녔던 이병철 회장께서 죽음의 문제와 대면했을 때 던진 질문이 그것입니다. 그때 던진 질문이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우러나오는 궁금증일 것 같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이회장이 신부님께 여쭸던 24가지 질문을 다시 새롭게 요약해서 묻겠습니다. 이번에는 신학자가 아닌 대한민국 대표지성에게 여쭈려 합니다.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이니 개인적의견이라도 전해주실 듯합니다.
이어령: 글을 쓰는 자유로운 사람이니 비유, 상상력, 추리력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질문1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우리는 지금까지 부모님을 믿고 살아왔지 정말로 낳아 주셨는지, 사랑하는지 의심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증명이란 말이 나오면 이미 끝난 이야기예요. ‘증명해 보세요.’ 한다면 DNA감정을 해야 하고 지금까지의 사랑을 믿지 못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미 부모자식간의 관계는 파탄난 겁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증명의 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관계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요. 그리고 증명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옆구리의 창 자국과 못 자국으로 도마에게 증명했습니다. 부활을 증명해 보인 거죠.
질문5 언젠가 생명합성과 무병장수의 시대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요?
30년 전의 이회장의 질문은 오늘날 BT, NT, RT, AI기술을 예견한 것 같습니다. 너무 복잡한 문제라 한 편의 우스개 이야기로 답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느 날 초능력 AI로봇이 신에게 ‘당신이 만든 인간과 내가 만든 인간 중 어느 쪽이 우수한지 내기를 해봅시다.’하고 도전했다. 하나님이 흔쾌히 받아주면서 어디 한번 해봐라 하셨죠. AI로봇이 흙을 모아 반죽하려 하자 하나님이 ‘잠간, 내가 만든 흙에 손대지 마. 흙도 네가 만들어.’하셨다.
질문6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는 걸까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신이 준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벌입니다. 뱀의 꼬임에 넘어갔지만 신처럼 눈이 맑아지고 지혜로워졌습니다. 인간이 피조물이면서 조물주가 되려고 했으니 패륜아며 혼돈의 세계가 열린 겁니다. 오늘날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문명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질문8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요?
부족한 인간이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지식과 지혜를 갖고 선악을 판단하려는 것이 원죄입니다. 원죄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남을 심판하려 하니까요.
질문12 종교란 무엇인가요?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요?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성공한 기업인, 과학자, 모든 것을 성취한 이들도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죽음입니다. 세상 위대한 사람도 다 죽었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죽음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이 두렵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면 종교는 없을 겁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 종교의 이름이 무엇이라도 마지막 질문은 죽음에 관한 것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