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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 ‘The performance, stupid.

성과가 좋으면 나태했던 과정까지 미화

by 물가에 앉는 마음

우리나라 산업화과정은 기적에 가깝다. 아니 기적이다. 허허벌판인 모래사장에서 수십만 톤짜리 유조선을 만들고, 드럼통을 두들겨 자동차를 만들던 나라가 세계 5위 자동차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중소기업의 트랜지스터를 하청, 조립하던 나라가 메모리 반도체분야는 세계 Top이 되었다. 모두 황무지에서 이룩한 결과이며 당연히 박수 받을 만하고 사람들은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른다.

물론 반대급부도 있다. 모로 가던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풍조는 편법과 탈법, 새치기 등의 부작용을 만들어냈고 현재 우리 사회는 그로인한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으며 인간성 상실도 후유증의 하나로 보고 있다. 빨리빨리 문화는 결과만 중시했고 과정의 중요성은 무시되었다. 국민들 성격은 급해졌으며 여론도 양은 냄비같이 쉽게 끓어오르고 쉽게 식어 여론재판으로 사망선고 받은 이후, 죄가 없다 해도 면죄부를 받기 어려워 영원히 죽을 수 있지만 여론을 주도했던 당사자나 기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등의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부정적 문화는 1~2세대에 걸쳐 조성된 사회문화이기에 단기간에 고쳐지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작은 아이는 고등학생시절 언니보다 공부하는 시간이 길어 밤을 새우곤 했다. 매번 시험 보기 전에는 ‘느낌이 좋아요.’했다가 시험을 보고나서는 ‘결과만 보지 말고 열심히 공부한 과정을 봐 주세요.’ 했다. 물론 나도 1등 성적표를 결과물로 갖고 왔다면 더욱 기뻐했을 수 있지만 작은 아이가 1등 했던 기억은 없는 듯하다. 그래도 과정을 봐 달라 할 줄 아니 커 가는 모습을 보고 흐뭇했었다.

사실 ‘사오정’, ‘공부가 뒤떨어지는...’등 작은 아이에 대한 별명과 수식어는 큰 아이와 비교의 산물이다. 서울 유수대학을 졸업하고 네덜란드 1,2위 대학원에 합격한 후 장학금을 주겠다는 2위를 마다하고 1위 대학원에 유학을 갔으니 적어도 ‘공부가 뒤떨어지는...’이란 수식어는 맞지 않는다.

‘사오정’ 작은 아이는 본인의 실력으로 ‘사오정’이 아님을 증명했다. 유학원 도움 없이 혼자 꼼지락거리며 대학원시험을 보고 합격통지서라는 성과물을 ‘탁’ 내놓았다. 나는 작은 아이가 공부하며 준비한 과정을 알기에 ‘대학졸업까지만 지원한다.’는 내 육아원칙을 고집할 수 없었다. 이처럼 과정이 중시되고 결과도 중시되는 것은 가족이니까 가능할 것이다.


회사는 성과를 중시한다. 성과가 좋으면 나태했던 과정까지 미화되나, 나쁘면 밤을 새며 열심히 노력했던 과정은 헛발질로 둔갑한다. 개인적으로 퇴직하신 CEO중 직원을 사랑하는 면에서는 권오형사장님을, 업무추진과 인간관계면에서는 태성은 사장님을 제일 존경한다. 예전 실장시절, 태성은 사장님이 취임하시자마자 당돌하게도 이런 말씀을 드렸다. 지금 생각하니 사장님과는 초면으로 너무 건방졌지만 기술개발에 대한 사명감과 자신감도 있었다.

‘제가 기술개발의 원년 멤버로 조직재건에 대한 책임감도 있지만 기술회사에서 기술개발을 등한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무너진 우리 회사의 기술개발조직을 살려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우리 회사 기술개발 조직, 정책의 문제점과 대책, 그리고 비전은 이렇습니다. 무너진 조직을 저에게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사장님 재임기간 동안 성과를 내놓으라고 독촉 하시면 안 됩니다. 기반을 다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데 3년을 쓰겠습니다.


성과를 내놓으라 독촉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고 사장님께서 약속대로 독촉하지 않으셨지만 장기계획을 만들며 한편으로는 단기성과를 내기 위해 고민했었다. ‘사장님께서 약속을 지키신다 해도 사장님 재임기간과 내 보직기간은 3년이다. 후임 CEO가 취임하면 상황은 달라지며 성과평가를 할 것이다. 정책과 조직이 지속되고 후배들이 살아가려면 뭔가는 단기성과가 있어야 한다.’ 최초 발명보다는 사업화를 전제로 한 기술개발에 정책의 방점을 찍고, 효율을 높이기 위한 ’중간진입전략‘, 성과를 내기 위해 역기술협력, 기술허여 및 판매, 부품수급을 위한 대리점 계약 등 비즈 모델을 만들었다. 단기 성과 덕분인지 몰라도 조직은 커졌고 승격대상 직원들은 모두 승격되었다.


기술연구원은 목표, 성과, 평가와 거리가 있는 조직이다. 평가 제외조직이었고 목표, 성과지표들이 명확하거나 계량화되지 않았다. 평가제외부서이다보니 핵심성과지표(KPI: Key Performance Indicator)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 막상 연구원에 와보니 성과에 낯설어하는 직원들이 많다. 나에게는 그것이 낯선 부분이었다.

조직과 개인은 무엇으로 평가 받는가? 몇몇 후배들과 이야기하며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들은 무엇으로 평가 받나?’

‘평가를 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이 기준이냐?’

‘연구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평가 기준은 무엇인가?‘

‘연구진도가 늦고 빠름의 기준은?’

‘신상필벌은 어떤 기준으로 시행되고 있나?’

‘연구원은 그동안 무엇을 했냐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반 행정 조직에는 일반화된 사항이나 기술연구원 측면에서 일부는 낯선 질문이 될 수 있다.

‘답은 성과다!’, ‘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목표가 있어야 하며, 평가하는 기준이 마련되어, 성과를 측정한다. 연구를 잘 하냐? 빠르나? 누가 성과를 많이 냈는가? 이번에 승격할만한 성과를 냈는가?’ ‘목표와 기준이 있어야 하지만 결국에는 성과로 귀결된다.’


대부분의 경영진은 ‘결코 서두르지 않겠다.’ ‘매출로 대변되는 외형적 성장만을 추구하지 않고 내실을 기하겠다.’며 점잖케 말 하지만 약육강식의 비정한 정글에서 조직을 관리하고 경영하다보면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나도 신임CEO께 ‘성과를 내놓으라고 독촉 하시면 안 됩니다.’ 했지만 성과창출은 가장 커다란 고민이었으며 성과부진으로 망하는 조직을 수도 없이 봐왔다. 경영진의 점잖은 멘트를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신임 CEO께서 느긋하고, 무리하지 않고, 성과가 없어도 좋게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회사업무의 거의 모든 것은 목표로 관리되고 성과로 평가받는다. 물론 과정도 중요하지만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계수화하고 광고도 해야 한다. 모든 조직은 코너에 몰릴수록 단기성과에 목을 맬 수밖에 없지만 ‘성과 포트폴리오’가 구성되어야 오래 갈 수 있다. 단기, 중기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연구개발 아이템을 적절히 개발, 보유해야 한다.


‘The economy, stupid.’ 빌 클린턴은 미국이 겪고 있는 불황 문제를 꺼내 부시의 연임을 막는데 성공했다. 국민들의 관심이 ‘경제적 성과, 경제 지표’에 쏠려 있는 것을 선거 참모들이 읽어 낸 것이다.

기술연구원에 와서 새삼스레 ‘성과’를 이야기 하는 것이 낯설다. 기술연구원뿐 아니라 기업에서 성과인 매출과 이익의 창출은 당연한 것이 되어 더 이상 중요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 이상하고 기업이 존재하는 한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The performance, stup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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