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을 살아보니(3) (김형석著, Denstory刊)
이전 편지에서도 말씀드렸듯 이 책을 조금 일찍 읽었다면 내 삶의 시행착오가 조금 줄었을 수 있었고, 행복에 대한 생각, 독서 기간, 노년의 준비 등에 대해 고민이 적었을 듯하다. 책을 읽는 기간도 넉넉하게 50년으로 잡았다면 그리 조바심 나지 않았을 텐데 고작 10년 목표를 세우고 성과가 손에 잡히지 않아 나의 무능을 탓하며 다시 10년을 연장했다. (김 교수님은 100년을 책을 읽어야 세계를 주름잡는 강국이 된다 했다.)
노년의 행복을 위해 경제적 준비뿐 아니라 글쓰기 등 일거리, 취미 거리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한다. 경제적 준비는 하지 못했지만, 퇴직 후인 60세부터의 새로운 삶을 준비해가고 있는 나에게는 적당한 가르침이다. 취미활동인 글쓰기를 위해 책 읽는 즐거움이 생겼고 내용은 허접해도 한 꼭지씩 쌓여가는 원고들이 나를 뿌듯하게 한다.
5. 늙음은 말없이 찾아온다.
보통 65세부터 노년기가 시작된다고 하나 노력하는 사람들은 75세까지 정신적으로 성장이 가능하다. 신체적 성장은 여자 22, 남자 24세까지이며 이후 서서히 하강하여 40대가 되면 성인병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늙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신적 성장과 인간적 성숙은 그런 한계가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사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성장이 정체되는 75세를 기준으로 보면 늙기 시작하는 것은 75세부터이고 80세가 되면 노년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래서 80세 정도 되어 ‘나는 과연 성공했는가? 지금도 행복하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가? 그래도 존경스러운 삶을 이어왔는가?’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65세에 ‘나도 대학을 졸업했으니까 내일부터 졸업생답게 사회에 나가 일을 해야겠다.’고 농담하며 연세대를 정년으로 떠났다. 그리고 만 31년간 일을 했으니 71년 동안 일한 셈이다. 앞으로 몇 해나 지금 생활이 연장될지 모르겠으나 매일 원고도 써야 하고 1주에 한두 번 강연도 나가고 있다. 내가 일을 하고 싶어서 한다기보다 아직은 사회가 요청해 오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다. 75세까지 공부하며 일했으니 어느 정도 창의적 성장을 해왔고 그 이후로는 성장은 아니더라도 높은 수준은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너무 일찍 성장을 포기하는 젊은 늙은이들이 많다. 아무리 40대라도 공부하지 않고 일을 포기하면 녹스는 기계와 같아서 노쇠하게 된다. 차라리 60대가 되어서도 진지하게 공부하며 일하는 사람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80쯤 되면 모든 사람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스스로 나는 행복했다고 인정하며, 주위 사람들이 존경스러운 일생을 살았다고 평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한편으론, 스스로 쓸모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부끄러움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자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나 자신도 인생을 돌이켜보면 50에서 80까지는 단절되지 않은 한 기간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50부터는 80이 되었을 때 나는 적어도 이러한 삶의 조각들을 완성해야 한다는 준비와 계획과 신념과 꾸준한 용기를 갖고, 제2의 마라톤을 달리는 각오로 재출발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흔히 들어온 이야기가 있다. 젊었을 때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장년기에는 신념이 있어야 하나 늙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활력이 넘치는 젊은 시기는 누구나 용기가 있다. 선한 의지와 고상한 목표를 위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30에서 60까지 가장 오랜 기간을 차지하는 장년기는 자신의 일과 더불어 성장하는 기간이며 일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평가받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 기간 동안에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라는 신념이 필요하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하며 해서는 안 될 것과 해야 할 의무를 구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뚜렷한 삶의 목표와 목적을 위한 확고한 신념이다.
그러다가 장년기가 지나면 대개의 경우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늙으면 주어진 일을 열정적으로 수행하기에는 인간적 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일과 명예의 욕심 때문에 더 유능하게 일할 수 있는 후배들의 시간과 가능성을 빼앗는 경우를 자주 본다. 심지어는 그 욕심과 무리한 의욕 때문에 스스로의 건강과 인생의 좌절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선한 의욕이라고 해도 노년기를 맞는 지혜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캐나다에서는 젊은 총리가 압도적 지지를 받고 당선되었다. 젊은 나이에 당선된 것은 아버지 총리 덕분이라고 캐나다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아버지인 트뤼도 총리는 오랜 기간 총리를 했기에 자신의 재선 문제를 놓고 긴 고민에 빠졌다.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가 있었으나 본인은 캐나다를 위해 후계자가 계승해야 할 때가 아닌가를 고민했고 결정을 내리기 위해 추운 날씨에 긴 산책을 떠났다. 생각을 정리한 트뤼도는 집에 도착해 좋은 후계자에게 양도하는 것이 캐나다를 위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그는 국민들에게 총리직 사임을 약속했고 많은 국민들에게 아쉬운 사랑과 존경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이번에 캐나다의 젊은 일꾼으로 등단하게 되었으니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노년기를 맞으면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를 갖추지 못한 노인들은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그때 버림받지 않고 기대와 존경을 받는 사람도 있고 사회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쓸모없는 노년기로 인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되는 것이라는 관점이 보편화되고 있다. 늙는다는 것은 꽃이 피었다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익어 가는 것 같은 과정이다. 그 기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이다. 지혜를 갖춘 노년기와 갖추지 못한 어리석은 노년기의 차이는 너무나 뚜렷하다.
그런 지혜의 한가지로, 힘들여서 해야 할 일은 후배에게 물려주고 우리는 그 뒤에서 선배다운 지혜를 갖고 도와주는 것이다. 성숙된 사회에 가면 원로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원로가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는 지혜로운 조부모와 부모가 있는 가정, 없는 가정과 비슷하다. 지혜로운 노년기의 부모는 직접 자신이 하던 일을 서서히 아들딸에게 물려주고 배후에서 질문도 받고 도움을 준다. 사회 일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때 노년기 지도자들이 갖춰야 할 정신적 자산이 넓은 의미의 지혜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직책이나 지위를 가지려 하지 않는다.
지혜는 책을 읽거나 공부해서 지식을 넓혀가는 일이다. 갖고 있던 지식을 접거나 축소하지 말고 필요한 지식을 유지하거나 넓혀가는 일이다. 지식을 넓혀가는 노력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해 갈 수 있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강의나 강연회에 참석하는 일도 필요하다. 후배들과 지식을 나누는 일도 즐거운 일이다. 여유 있게 노력하는 자세만 갖추면 지적인 후퇴는 방지할 수 있다.
노년기의 지혜는 가능만 하다면 늙으면 이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는 모범을 보여주는 책임이다. 나이 든 사람이 젊은이에게 버릇없다고 불만을 갖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다.
여러 해 전 일본에서 60대 중반 여성을 대상으로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설문조사를 했다. 공부를 시작한 사람, 취미활동을 계속한 사람,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사람이었다. 아무 일 없이 세월을 보낸 사람이 가장 불행했고 가족과 더불어 세월 보내고 친구들과 때때로 만나는 여성들은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노후에 일이 없는 사람은 가장 불행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년이 없는 학자나 예술가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노후를 위해 경제적 준비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일을 준비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 가지 즐거움 중의 하나를 선택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공부를 계속하는 즐거움은 경험해본 사람이 안다. 난을 가꾸는 즐거움이 있다면 난 가꾸는 취미, 글쓰기, 운동 등 취미활동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
2011년 한림대에서 一松상을 수여했다. 이미 내정했기에 감사히 받고 답사를 했다. “제가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90이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오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다시 한 번 교단에 설 수 있다면 정성껏 제자들을 위하고 사랑해주고 싶습니다. 여러 교수님들은 저와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새 출발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제 나이가 되면 여러분의 인생을 행복과 영광으로 이끌어 주실 것으로 믿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