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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 배꽃 하얗게 지던 밤에(이철수著, 문학동네刊)

이 책은 시화집으로 그림과 시를 봐야 의미를 알 수

by 물가에 앉는 마음

이 책은 시화집으로 그림과 시를 봐야 의미를 알 수 있다. 제목과 해석을 옮깁니다.


이름 모르겠던 꽃나무에게

(詩: 쌍계사서도 살더니 천은사에도 사는구나. 흔한 놈!)

꽃들은, 혼자 조용히 제 꽃을 제가 피워내는데

사람은, 실없는 이름을 다투느라 소란스럽습니다.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는가? 하는 이도 있지만 이름은 사람이 지어낸

손가락질일 뿐입니다.

꽃 한 송이 환히 피어나는 것, 이름 때문이 아닙니다.

진면목은 이름보다 먼저 있습니다.

이름 없는 흔한 것들이

한꺼번에 꽃 피어 흐드러지면

그도 장관입니다.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이 과연 있기는 한가?


그 깊은데 상선암

멀고 깊은 자리는

힘들여서 천천히 찾아들어야 깊은 줄 압니다.

그 깊은 데를

차를 달려서 보고 오면 허탕입니다.

언제고 다시 가야 합니다.

그렇게 다녀오는 것에는

밟을 답에 조사할 조를 써서는 안 됩니다.

상선암

어디에나 그 이름 자리는 깊습니다.

거기 이르는 길이, 호젓하고 조용했습니다.

그 자리 알려주시던 이는 봄날 이승 떠났습니다.

다비장,

소나무 향기,

그 깊은 데 화엄사 언저리

꿈같습니다. 스님!

그이, 그 깊은 자리를 혼자 가셨습니다.


좌탈

그이는

오실 때처럼

가벼운 빈손으로 가셨습니다.

철들고 나서

내내 빈손이었습니다.

내내 빈 마음뿐이었습니다.

촛불 꺼지듯 가셨으니

촛불 켜듯 오실 터입니다.


좌탈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정진도

세상에서는

겉멋이 되고 분위기가 됩니다.

어느 수행자가 좌탈이 소원이어서 방 안에 연탄불 피우고 앉아

사투를 벌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양내고 살려는 욕심이 대개 앉아서 죽었다는 바보짓과 비슷한 꼴입니다.

미물이 사람보다 나아서

배추 한 포기 위에서 한 생애를 다 보내는 청벌레도

꾸미고 살지는 않습니다.

꾸미고 죽지도 않습니다.

청벌레 한 마리,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터뜨려 죽입니다.


눈보라

초록 이정표에는 곳곳의 지명이 선명하게 박혀 있지만,

영어로도 크게 적혀 있지만,

세상에는 길 없습니다.

마음에 이르는 길 없습니다.

그 길에서 살펴보니

아, 내게는 눈도 없습니다.

눈 없이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배꽃

하늘 보면, 다 버리고 사는 것이 옳은 줄 알게 됩니다.

맑은 날, 하늘에 가득한 별들이 사방팔방 연속무늬를 배경으로

가끔 떨어지는 별똥을 만납니다.

별도 때가 되면 꽃 지듯 떨어집니다.

별도 지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지는 별도 보고

땅에서는 달빛의 하얗게 빛나는 배꽃의 낙화를 봅니다.

사람도 지는 법,

별 보고 꽃 보는 우리들도

그렇게 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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