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2) (이어령著, 김태완역음, 열림원刊)
질문15 기독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나요?
나그네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데 제사장도 레위인 사제도 못 본 척하고 지나가요. 이교도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만 나그네를 살려주고 갔어요. 그러면 기독교인이 천국에 가겠어요? 이교도인 사마리아인이 천국에 가겠어요?
질문17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개신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요?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가르치고, 구교나 신교나 오른쪽 뺨을 맞거든 왼쪽 뺨을 내주라고 하니 배타적 종교가 아닙니다.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신, 구 가릴 것 없이 기독교정신에서 벗어난 사이비종교입니다.
질문18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천국이나 지옥은 현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저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니 스토리텔링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고 보니 사후가 기가 막힌 거예요. 으리으리한 집에 하인이 수천 명이 넘어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일주일이 지나니 너무 심심한 겁니다. 그래서 드라이브나 할까? 요리를 만들어 먹을까? 하는데 하인들이 안 된다는 거예요. 여기서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해주지만 직접 하는 것은 안 된대요. 그래서 이 사람이 ‘이 따위가 천국이면 차라리 지옥에 가서 살겠다.’했더니 하인들이 ‘여기가 지옥입니다.’하는 거예요.
서로 사랑하고 자기가 먹을 거 자기가 벌고, 서로 나눠 먹고 이런 참된 의미가 있는 곳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천국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사람은 모든 것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질문20 성경에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요?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못 간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가진 게 너무 많으면 쉬이 버리지 못하니 어렵다고 하시며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하셨습니다. 가난한 자, 부유한 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치지 않은 자는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질문21 미국은 사실상 국교가 기독교인데 왜 그리도 범죄와 사회혼란이 많으며 세계의 모범 국이 되지 못하나요?
미국은 문제 많고 결코 타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나라지만 비자를 받기위한 줄이 길게 서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열린 악은 닫힌 선보다 희망이 있고 내일이 있는 겁니다. 조용하고 사건도 없고 총성이 들리지 않아도 덮어진 악은 영원히 구제의 길이 없어요.
이어령 선생이 말하는 코로나의 역설, 죽음의 역설(월간조선 2021.06월 기사를 수정 보완한 것)
인류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경험하게 되었다. 세계대전보다 더 거대한 죽음 앞에 벌거벗은 채로 살아가게 되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한 이불 속에 나란히 눕게 되었다. 죽음은 끔찍한 일상이 되었다.
이어령: 지금까지 죽음을 추상적이며 멀리 있는 존재로 여겼는데 코로나19를 겪으며 달라졌어요. 죽음은 우리 안에 갇힌 사자에 불과했으나 무시무시한 사자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죠.
우리안의 사자, 호랑이가 길거리로 뛰어나온 거지. 죽음의 공포, 굶주린 맹수의 습격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온 마을, 온 인류가 깨닫기 시작한 거야.
대담자: 죽음의 공포가 일상이 됐어요.
이어령: 지금까지 알던 그 사자가 아니야. 무섭지만 그래도 안심하고 봤던 그 놈을 골목 어귀, 만원버스 안, 시장에서 딱 마주치게 된 겁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죽는다.’는 철학적 가르침보다 더 강렬하게, 이 무시무시한 사자를 코로나19가 인류에게 현실덕 가르침을 보여준거죠.
대담자: 코로나19가, 죽음이 모든 가치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인가요.
이어령: 실존적으로, 현실적으로 우리가 죽음을 겪고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이 언제 날 잡아 먹을지 모르는 것이 공포지요. 예정된 죽음은 공포가 아닐지 몰라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죽음, 느닷없는 공포가 정말 무서운 존재지요.
대담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죽음, 드라마틱한 죽음의 공포를, 한국인이 코로나19를 통해 경험했다는 말인가요.
이어령: 하루 수천 명이 죽고 시체가 장작더미에 쌓여 있는 절망적 죽음을 생각해봐요. 시신을 소각하는 연기가 온 천지에 가득한 그런 죽음..., 우리가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서양은 확진자 급증으로 의료체계가 붕괴되고 병원화장실에 시신이 방치되는 모습이 공개되어 충격을 주었습니다. K방역 성공과 무관하게 참상입니다.
대담자: 1665년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도입한 위생 개념과 코로나19 방역도 비슷한 개념 같아요.
이어령: 코로나19가 창궐하니 방역독재가 등장한 거야 ‘너희 살려줄게! 내말들어 백신으로 살려줄게.’ 하니까 스스로 순종하며 노예가 되는 식이지.
런던 시민이 흑사병과 죽음을 겪으면서 위생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산업혁명 기에도 발생한 사회문제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건강문제였습니다. 노동자 수명이 비위생적인 전염병과 관련돼 있다는 현실을 발견하고 노동자의 비참한 삶도 응시하게 된 겁니다.
또 성직자에 의한 성경의 독점과 진리의 독점이 아니라 가내수공업, 중소상공업이 길드를 통해 협력하는 것과 같이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사회개혁, 종교개혁, 나아가 산업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지요. 페스트가 가져온 놀라운 변화인 셈입니다.
지금의 코로나19도 비슷해요. 죽음이라는 것이 바이러스, 질병을 통해 개개인의 마음속에 들어와 경험하게 되고, 죽음이 자기 일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죠. 죽음을 통해 황폐화된 개인을 응시하게 된 겁니다. 이 죽음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두고 볼 일입니다.
대담자: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그런 죽음이 아니더군요.
이어령: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를 우리는 술 먹고 인생을 논하는 정도로 죽음을 생각했잖아요. 죽지 않는 존재는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거죠. 생명은 다 죽는데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통해 메멘토 모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겁니다.
대담자: 베이컨은 ‘최고의 증거는 단연 경험’이라 했는데 경험론자는 결국 경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어요.
이어령: 우리는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수학만 하더라도 경험과 이해만으로는 안 돼. 이성의 힘을 가졌을 때만이 수식을 계산할 수 있고 사칙연산을 하는 거죠. 수학은 인간경험과는 관련이 없어요.
코로나 19를 통해 감각으로만 느끼던 죽음, 일상의 경험으로 알 수 없던 죽음을 이성을 통해 만나고 알게 된 거지. 코로나19현상은 이성을 통해 내다보는 ‘메타언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대담자: 역설적 발견이네요.
이어령: 인류가 절대 선을, 초월적인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포스트코로나로 인해 초월적 상태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된 겁니다. 동서양 인류가 함께 경험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로 코로나19를 똑같이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놀라운 역설이지.
대담자: 포스트 코로나에서 죽음의 문제를 새롭게 직시하게 된 거네요.
이어령: 그동안 죽음은 개별적인 죽음에 불과 했어요. 코로나19는 개별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죽음입니다. 나도 암으로 죽음을 마주하고 있지만 추상적인 것에 불과 했어요. 하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며 그냥 죽음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단절의 죽음, 즉 아우슈비츠수용소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더 불안해지고 옆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 없이 죽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