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 감옥으로부터의 사색(2)

감옥으로부터의 사색(2) (신영복 옥중서간, 돌베개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갈수록 글씨가 어려워져 붓이 쉬이 잡혀지질 않습니다. 자기의 글씨에 대한 스스로의 부족감과, 다라는 이 부족감의 표현이겠습니다만, 글씨에 변화를 주려는 강한 충동 때문에 붓을 잡기가 두려워집니다. 무리하게 변화를 시도하면 자칫 巧(교)로 흘러 亞流(아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방만한 반복은 자칫 固(고)가 되어 답보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巧는 그 속에 인생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이며, 固는 제가 저를 기준 하는 아집에 불과한 것입니다. -1981.11.04 아버님께 -


筆才(필재)가 있는 사람의 글씨는 대체로 그 재능에 의존하기에 빼어나긴 하되 재능이 도리어 함정이 되어 손끝의 巧를 벋어나기 어려운데 비하여, 필재가 없는 사람의 글씨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기에 그 속에 혼신의 힘과 정성이 배어 있어서 “단련의 미”가 쟁쟁히 빛나게 됩니다. 결국 서도는 그 성격상 토끼의 재능보다는 거북이의 끈기를 연마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아름다운도 이와 같아서 타고난 얼굴의 조형미보다는 그 사람의 지혜와 경험의 축적이 내밀한 인격이 되어 은은히 배어나는 아름다움이 더욱 높은 것임과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보는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첩경과 행운에 연연하지 않고 역경에서 오히려 정직하며, 旣存(기존)과 權富(권부)에 몸 낮추지 않고 진리와 사랑에 허심탄회한... 그리하여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이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육중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1982.04.13 형수님께 -


섬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 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며, 서울 사람에게 있어서 해는 빌딩에서 떠서 빌딩으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사람이 산골 사람을, 서울 사람이 섬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관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데 유요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1982. 07. 13 계수님께 -


자기의 그릇이 아니고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여우와 두루미의 우화처럼, 성장환경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자기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대화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언어란 미리 정해진 약속이고 公器(공기)여서 제 마음대로 뜻을 담아 쓸 수가 없지만 같은 그릇도 어느 집에서는 밥그릇으로 쓰이고 어떤 집에서는 국그릇으로 사용되듯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성장과정과 경험세계가 판이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먼저 부딪치는 곤란의 하나가 이 언어의 차이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책가방 끈이 길고 먹물이 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간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십 수 년간 징역을 살아오는 동안 이 두 가지 상반된 경향의 틈새에서 여러 형태의 방황과 시행착오를 경험해왔음이 사실입니다. 복잡한 표현과 관념적 사고를 내심 즐기며, 그것이 상위의 것이라 여기던 오만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粗野(조야)한 비어를 배우고 주워섬김으로써 마치 群衆觀點(군중관점)을 얻은 듯, 자신의 관념성을 개조한 듯 착각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쪽을 절충하여 “중간은 정당하다.”는 논리 속에 한동안 안주하다가 중간은 “架空(가공)의 자리”이며 방관이며, 기회주의이며, 다른 형태의 방황임을 소스라쳐 깨닫고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나던 기억도 없지 않습니다. -1983. 02. 07 계수님께 -


교도소의 벽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날카롭게 벼리어놓습니다. 벽의 기능은 우선 그 속의 것을 한정하는데 있습니다. 시야를 한정하고, 수족을 한정하고, 사고를 한정합니다. 한정한다는 것은 작아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넓이는 좁아지고, 길이는 짧아져서 공간이든 시간이든 사람이든 결국에는 한 개의 점으로 수렴케 하여 지극히 단편적이고 충동적이고 비논리적인 편향을 띠게 합니다. 장기수들이 벽을 무서워하는 이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983. 03. 15 형수님께 -


노소가 함께 일하는 경우에 노인들은 젊은이들에 대해, 젊은이는 노인들에 대해 일정한 불만을 갖게 됩니다. 이는 주로 일을 하는 자세, 일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오는데 젊은이들은 일을 벌여놓기만 하고 마무리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의 전후도 모르고 함께 해야 할 것을 제각각 처리하니 부산하기만 하고 진척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태도가 어디서 온 것인가 좌상님께 물어보니 농사일을 해보지 않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간결하고 정곡을 찌른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농사일은 파종부터 수확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일관된 노동입니다. 일의 선후가 있고, 계절이 있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생명인 이를테면 볍씨의 일생이면서 그 우주입니다. 부품의 분업생산으로 조립 생산하는 공업노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젊은이 들은 노동을 수고로움, 즉 귀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비하여 노인들은 거기에다 자신을 실현하고 생명을 키우는 높은 뜻을 부여합니다. 젊은이들은 노동을 시간의 소비, 에너지의 소지로 생각하는 반면 노인들은 노동을 생산으로 생각하니 사고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의미를 느낄 수 없는 일에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긍정적입니다. 무슨 일이건 일에 몰입하여 장인의 성실성을 쏟는 노인들의 무의식성에 비하면 젊은이들의 강한 주체성은 평가되어야 하며 노인들에게 없는 탄력이며 가능성입니다. -1985. 02. 05 계수님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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