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굵고 깊게 쉼표하나 찍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머님 낙상, 입원과 수술, 소천까지 5개월여, 가슴조린 시간은 길었지만 물리적으로는 짧은 시간이었다. 미국 누나는 상속문제로 우리 집에 발이 묶여 있다가 크리스마스 즈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어서 입국한 작은 아이가 2개월여 한국 재택근무를 마치고 일상복귀를 선언한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어머니 소천 즈음 반려견의 쿠싱증후군(Cushing's syndrome)발병 등 최근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었다. 시계바늘이 빠르게 돌아가던 집에는 다시 느린 시간과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태해지는 것이 싫어 의도한 바쁜 삶을 살았기에 한가하고 여유로울 때가 있었나 싶다. 의도해서 바쁜 남편과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집사람도 한가한 시간을 누리지 못한 사이 집사람은 환갑이 되었다. 작은아이가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 조촐한 환갑잔치가 열렸다. 작은아이가 홈마카세▘를 주문하고 큰아이 부부가 축하 케잌, 여성들 핫 아이템인 다이슨 에어랩,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용돈 봉투, 직접 구운 치아바타를 갖고 왔다. 치아바타는 내 몫인 것이 분명한데 환갑 맞은 집사람이 더 좋아한다. 착한 남편이니 양보했다.
(홈마카세▘: 홈(Home)과 주방장 특선메뉴인 오마카세(お任せ)의 합성어로 집주인이 식재료를 직접 구입해서 상을 차려야 하나, 요즘은 음식점 배달메뉴에 ‘홈마카세’가 있다.)
퇴직준비는 했으나 환갑 준비를 하지 못했었다. 회사업무를 마무리하고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남기고 퇴직하겠다는 생각으로 고민했으나, 인생 2막이라는 60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고민이 없었다. 정년퇴직도 60.5세에 했으며, 임금피크제로 보직 없이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나 퇴직 직전까지 조그만 Project를 추진하고 있었다. 한참 일을 하고 있을 때라 별 감흥 없이 또 실감나지 않게 60을 맞았었다. 정말 60이 된 것일까? 실감나지 않았고 60.5세 퇴직하는 마지막 날까지 같은 시각에 출근하고 같은 시각에 퇴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원으로는 충실했는지 몰라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것 같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삶이 행복한 것인가?’ 책보고 공부만 했지 정작 60을 맞은 본인의 행복을 위해 준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회사일이 아니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집사람과 아이들이 준비한 60기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타의에 의해 삶에 쉼표 하나 찍고 마음 편히 쉬어 봤다.
집사람은 童顔(동안)이고 나는 老顔(노안)이다. 합해서 평균이니 이것도 자연의 조화다. 늙지 않을 것 같았던 집사람도 흰머리가 많이 늘었다. 童顔이기에 부정할지 모르겠으나 童顔이나 老顔에게도 환갑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피할 수 없다. 환갑 맞는 준비를 했건 하지 않았건 시간은 빠르고 되돌릴 수 없다.
집사람은 손에 물 묻혀보지 않고 결혼했으나 손 마를 새 없었다. 시부모 모시고 살았고, 두 아이 키우고, 반려견 키우다 보니 어느덧 사위도 봤고 곧 할머니가 될 예정이다. 한편으로 미안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가 집안 살림을 모른 체 한 것은 아니었다. 같이 살 때는 부엌일도 도왔고 손가락 주부습진을 보고 회사간호사가 깔깔거렸던 적도 있지만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을 지켜낸 건 집사람이다. 주부습진이 생겼다 해도 결혼 후 혼자 지방을 돌아다닌 기간을 따져보니 13년이나 되었다. 잘 된 일들은 모두 집사람 덕분이다.
이제는 쉼표하나 크게 찍고 깊게 심호흡 했으면 한다.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본인의 삶만 생각하면 된다. 길고 깊게 숨을 쉰 다음,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면 충분하다. 아이들 뒷바라지? 아이들은 제 앞가림을 하고 있으니 과도한 걱정과 간섭은 아이들에게도 거북한 일이다. 걱정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잘 살고 있고 잘 먹고 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반려견이 앓고 있는 쿠싱증후군으로 인해 한동안은 꼼짝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으니 여행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장미 한바구니 보낸 날, 오늘만큼은 ‘무엇해서 먹을까?’ 물어보지 않으려 한다. 손에 물 묻히지 말고, 지금은 굵고 깊게 쉼표하나 찍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자식의 인생에 절대 간섭하지 마라
부모 세대가 예순을 넘기면 곧 자식의 시대가 왔음을 상징한다. 집안에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시기다. 이즈음부터는 자식이 집안의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부모가 연장자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부모 중심으로 맞춰서는 안 된다. 우주에도 자연계에도 메인 스트림이 있다. 우리 사회에도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 동력이 있으며 어떤 조직에서나 실세가 있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나이든 부모가 메인 스트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자식을 어떻게 키웠는지 아냐’며 억울해 하는 부모에게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쏟아 부은 정성을 희생으로 여기며,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억울해 한다. 부모가 의무를 다한 것이므로 희생한다는 것 자체가 착각이다. 그리고 자녀는 나의 분신이 아니라 갖고 있는 인격 수준대로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독립적인 단위다. 자식이 부모에게 독립하려고 애를 쓰듯, 부모도 어느 순간부터 자식에게서 독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동안 자녀를 돌보기 위해 소홀했던 자신을 돌보고 새롭게 펼쳐진 인생을 마음껏 누려야 한다.
-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근후著, 갤리온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