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 인문학은 밥이다.(2)

인문학은 밥이다.(2) (김경집著, 알에이치코리아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예전 선비님들은 文, 史, 哲(문사철)뿐만 아니라 詩, 書, 畵(시서화)에도 능했다. 인문학을 공부중인 학생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이란 저자인 김경집선생 주장과 비슷하게 人文은 天文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사상과 문화,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經營學이 인문학이냐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는 마케팅 까지도 인문학이라 생각하고 있어 문사철만 인문학이라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제품 판매를 위한 마케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소비심리학, 광고학, 협상전략, 판매대상국가의 역사와 문화 등을 알아야 하므로 인문학이 배제된 경제활동은 실패한다. 협의의 ‘마케팅’ 즉, ‘파는 행위’ 자체는 인문학이 아니나 ‘유, 무형의 제품을 잘 팔기 위해 인문학이 가미된 마케팅’은 인문학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없다는 혼자만의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는 제품개발 단계부터 적용될 것이므로 인문학의 범주와 적용범위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인문학의 범위는 무척 넓어 본 책에는 철학, 종교, 심리학, 역사, 과학, 문학, 미술, 음악, 정치, 경제, 환경, 젠더가 소개되어 있다. 철학부터 환경까지는 인문학에 속한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있지만 마지막에 언급한 ‘젠더?’ ‘인문학??’ 먼저 읽어보기로 한다.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엄마가 안아줘도 뽀뽀뽀...’누구나 알고 있는 동요로 노래를 흥얼거릴 때도 양성불평등과 성차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고정관념화 되어있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생물학적 성(Sex)’와 ‘사회적 성(Gender)’의 구별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녀가 다르며, 유별하고, 따라서 다른 길을 가야한다는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래서 사실은 후천적으로 남녀의 가치를 구분했다.


사회적 성을 지칭하는 젠더는 원래 성별 구분이 모호한 상태로 태어난 사람 즉 출생 시부터 남녀의 판명이 어려운 사람을 지칭한 말이었으나 오늘날처럼 사회적 성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은 인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였다. 여성인권운동의 전개에 따라 젠더는 다양한 사회제도라는 후천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남녀의 구별된 상태를 의미하였다. 젠더의 개념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 증대에 따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이나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젠더로서의 여성은 없고 섹스로서의 여성만 존재하는 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배제된 삶’을 강요하게 한다. 그래서 ‘뽀뽀뽀’는 남녀차별의 동요이다. 1997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정치 참여율은 세계 94위였다. 여성들의 정치 참여의 길을 넓히기 위해 여성할당제가 도입된 것은 2002년이었다. 광역의회 비례대표의 50%이상을 여성으로 공천하도록 했다. 2005년 개정된 공직선거법에는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비례대표의 50%이상을 여성으로 하되 홀수에 여성을 배치해야 한다고 했고 총 지역구 수의 30%를 여성으로 하도록 권장했다. 상당수의 남성들은 역차별이라며 반발하나 기존의 차별과 억압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차별과 차이는 다르다. 차이는 섹스의 문제이고 젠더는 차별의 문제이다. 섹스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나 그 차이 때문에 젠더에서의 차별을 정당화 할 수 없다.


성경에 따르면 신이 창조의 마지막 날에 인간을 만들었다. 남자만 만들었으나 외로워 보여 갈비뼈 하나를 뽑아 숨을 불어 넣으니 여자를 만들었다. 남자들은 이 대목에서 신이 났다.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직까지 주례사에 그 구절을 인용하면서 신부에게 신랑을 잘 섬겨야 한다고 사람도 있으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그러면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성서를 남자가 썼다는 것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배하려는 욕구가 있으며 근육의 차이로 여성보다 남성이 유리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산업혁명으로 근육의 중요도가 낮아져 여성이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컴퓨터, 전자산업의 발달로 남녀는 평등해졌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근육이 작동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은 지배,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며 협력과 파트너십을 갖고 공존하는 사이다. 이러한 현상을 명품 남성복 아르마니가 착안하여 남성수트에서 어깨패드를 제거 했다. 근육을 과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패드를 제거하니 어깨선이 우아해 졌고 남성복도 맵시 나게 만들 수 있었다. 아르마니의 사례는 근육의존성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져야 인간이 보다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좋은 보기이나 여전히 많은 남성들은 머릿속에 가짜 ‘뽕’을 잔득 붙이고 산다. 더 웃기는 것은 그것을 멋으로 착각하는 남성들이 많다는 것이다.


20세기 가장 큰 변화가운데 하나는 성 해방이었다. 억압적이었던 성이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성의식으로 바꿨다. 호칭도 남자는 결혼 전후가 미스터로 동일하지만 여자는 혼전이 미스, 후는 미시즈로 구분하는 것이 부당하니 미즈로 통일하자는 주장은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여졌지 만 감성적으로는 거부되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교육증가와 사회참여증대는 점차 확대되었으며 여성이 남성보다 능력이 떨어진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사법시험 상위 10위권은 거의 여성이며 여성이 체력이 요구되는 육사에서 일등으로 졸업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것은 성의 문란인가? 자연스러운 것을 문란하다고 낙인찍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예전에는 도덕적 비난의 이유와 자녀 교육문제로 이혼을 꺼렸다. 또한 이혼여성의 경제적 안정이 어려웠기에 이혼을 꺼렸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이 독립적 경제활동을 할 수 있어 이혼도 자유스러워지고 이혼율도 증가하는 것이다.

결혼식에서 왜 남자는 당당하게 들어가고 여자는 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버지가 신랑에게 딸을 건네주는 것이다. 마치 신부가 물건처럼 느껴져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헨리크 입센’이 120년 전 ‘인형의 집’에서 ‘노라’를 통해 비판했던 것을 왜 아직도 반복하는 것 일까? 퇴장할 때도 신부가 신랑 팔에 팔짱을 두른다.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동등한 인격체로 함께 미래를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출발부터 종속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함께 입장하고 나란히 손잡고 퇴장했으면 한다. 17세기 작가 ‘르 자르 구르네’가 1622년에 이런 말을 했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인간이다. 남자와 여자는 완벽하게 하나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뒤집으면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과 상통한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날 뿐이다. 그들의 뿌리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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