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1. 짧은 1년 반 이었습니다.

머물었던 자리가 향기로웠기를 바라며

by 물가에 앉는 마음

GT정비기술센터에서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짧은 1년 반이었지만 많은 것을 자세히, 오래, 멀리 보려 노력 했으나 부족한 능력 탓에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쉬움만을 남기고 떠나려 합니다.


1. 피비린내 났지만 머물었던 자리가 향기로웠기를 바라며


직장생활이라 뜻대로 될지 모르겠으나 GT정비기술센터를 빠른 시일 내 떠났으면 합니다. 내년 상황도 만만치 않기에 내가 잔류함으로 인해 원가율이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않고 임금피크제 적용을 받아도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요. 내가 잘 할 수 있고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는 GT센터에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개작두 휘두르며 살벌하게 부임하여 퇴임직전까지 구조조정의 피비린내가 진동했으니 GT 식구들의 숨통도 트여줘야 하고요. 기술연구원으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금년 초간고시 합격자까지 따져보니 부임 후 20명(?)의 식구가 그만두거나 자리를 옮겼습니다. 타의에 의해 떠나간 옛 식구들이 GT센터를 욕해도 욕은 내가 먹겠지만 새로운 임지에서 환영받을지는 본인들 몫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그중 일부는 노사가 노력하여 어렵게 보냈는데 어려웠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합의 노선이 달라서가 아니라 받는 곳에서 거부하는 이유는 고령, 고연봉, 저기술, 그리고 개개인에 대한 평가입니다.

생계의 기술, 생존의 기술을 자주 이야기 했는데 생존의 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합니다. 제3자가 보는 현실은 지극히 정당하고 객관적이기까지 하나 당사자가 보는 현실은 비정하기 짝이 없지요. 정당하건, 비정하건 현실을 부정할 수 없으며 떠난 사람의 뒷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모든 식구들이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나 아직은 미흡하며 일하는 자세도 바꿔야합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며 비정상을 정상으로 본다면 사고의 확장성 면에서 남들을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변화된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 진퇴를 결정해야 합니다. 남의 손에 의해 축출되는 모습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예전과 같은 전성기가 돌아와도 세상은 변했습니다. 30여 년 전 평소에는 일을 하지 않다가 체육대회 때만 두각을 나타내는 직원들이 모습을 감췄습니다. 그들이 자진해서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축출한 것은 바로 여러분들이며 시대정신에 의한 것이지요.


인적청산 없이 1년이란 단시간 내에 문화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고 있지만 건방지고 무모하게도 GT센터 문화를 바꾸려 했습니다. 무모한 시도에 대해 수군거림도 있었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비난도 있었지만 왜 GT센터 문화를 바꾸려 했는지는 시간이 흐른 뒤 여러분들이 평가하면 됩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기존의 GT센터 문화에 녹아들었으면 흔적이 남지 않겠지만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직급 간, 계층 간, 직종 간 갈등을 인정할 수 없었고 훗날 GT센터 발전을 가로막는 제일 커다란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모한 시도가 갈등이 봉합되고 치유하는 노력의 단초가 되었다면 내가 머물었던 자리는 분명 향기로웠다고 생각합니다.


2. 고급스러운 삶을 위해


GT정비기술센터 출근 첫날 취임식 석상에서 장밋빛 전망을 내놓아야 하는데 2018년도까지 적자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시장 전망을 했습니다. 구조조정 카드를 들고 왔기에 직원들 군기 잡으려 엄포를 놓으려는 의도는 아니고 세계에너지 수급전망에 따른 분석이었습니다. 이어서 개작두 휘두르며 직원 감축과 보직간부 전원을 교체하는 강수를 두더니 한편으로는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해 매월 Talk Concert를 개최했습니다.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이것도 잘못되었고 저것도 고쳐야 한다고 독불장군 식으로 밀어붙여야 하는데 ‘행복하고 고급스럽게 삽시다.’ 라며 Soft하게 접근하니 분명 직원들 눈에는 다중성격자로 보였을 가능성이 높고 적어도 정상으로 비춰지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예전부터 처장이 새로 부임하면 의욕이 넘쳐 미친놈이 저러다가 제풀에 지쳐 그만두겠지 하는 직원도 있었을 듯 하고, 왜? 기술쟁이가 기술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인문학이 어떻고 고리타분한 논어, 맹자, 장자이야기를 할까? 많은 의문부호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부임 3개월 전부터 GT센터의 문제점과 문화를 파악했습니다. 전임 CEO와 많은 부분 의견차를 보여 자리를 옮길 필요가 있던 차에 ‘CEO가 손을 보겠다.’는 신호가 접수되어 갈 자리를 봐두었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한 셈이지요.

직원들은 공장 설립 후 공정분업화에 따라 전문화되어 있어 활황기에는 유리했으나 현재와 같이 인력감축이 수반되는 불황기에는 1인 다기술 보유가 필요합니다. 전문화로 인해 업무침해를 싫어하는 극히 개인주의적 성향은 조직문화까지도 이기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내 것만 챙기고 우선시하는 이기적 조직문화는 가장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일거리가 없어서 적자가 발생되어도 열정 있고 단합하는 조직은 살아남기 위한 어떠한 일도 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집단은 본인에게 이익이 되는 일만 하려하니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접근하기 어렵고 방향을 재설정하기 어려운 것이 조직문화입니다. 구조조정이란 카드를 들고 왔고 Position Power를 이용하여 개혁을 강요할 수 있으나 효과는 그때뿐이며 시간 지나면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조직문화입니다. 감성적으로 접근하여 가장 기본이 되는 것부터 심플하게 또한 이해하기 쉽게 컨셉을 정했는데 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조직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은 결국 여러분들 책임입니다. 매월 1일, Talk Concert때 내용은 달리 했지만 주제는 같았습니다. 양보, 배려하고 역지사지 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동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고급스러운 GT문화’가 만들어지고 ‘출근하고픈 GT정비기술센터’가 만들어집니다. 백마 타고 오는 전지전능한 초인은 없습니다. 절대로 기대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3. 행복을 지탱해주는 기반인 직장을 소중히 여기며 환경변화에 대응해 우리가 혁신의 주체가 되어야

세계적 경기침체로 굴뚝산업 가동률이 저조하니 전력예비율이 30%에 육박하여 발전단가 높은 가스터빈은 가동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정비물량이 줄어들어 매출추이는 하향세에 접어들었으며 올해 매출전망 또한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어렵습니다. 미세먼지 문제로 청정연료를 사용하는 가스터빈 위주 발전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으나 새 정부가 들어서도 업무인수기간, 에너지 믹스 적정성 검토 등의 사항으로 금년 내에도 가스터빈위주 발전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자원인을 가스터빈 가동률 저하에서만 찾는다면 短見(단견)이자 책임회피가 아닌가 합니다. ‘가동률 저하’만 원인이라면 우리 회사의 대처방안은 ‘할 것 없음!’으로 끝납니다.

가동률 저하 원인도 있지만 경쟁사 출현으로 정비단가 하락과 최저가 낙찰제가 도입되었으며, 신기종 가스터빈은 제작사 직접정비로 시장은 좁아졌고, 우리 회사의 새로운 정비 상품 개발지연 및 공정개선/공정자동화에 의한 원가절감노력 부족 등 여러 가지 사항이 복합되어 있으며 우리 대처가 빠르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중장기 시장전망은 세계경제 침체로 유가가 하향 안정화되어 있으며 산유국들도 자금사정이 악화되어 낮은 가격으로 원유를 판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세계경기가 회복되어도 배럴당 40$정도에 채산성이 있는 쉐일오일이 있으므로 OPEC주도로 오일 값이 폭등하는 상황은 좀처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탈 원전, 탈 석탄정책을 주장했지만 신재생에너지를 포함한 에너지빈국인 우리나라가 급속하게 에너지 Mix를 변경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상당 기간은 연료가격이 낮은 원자력, 석탄, 중유를 원료로 하는 발전소 위주의 운전을 할 것입니다. 전력수요가 증가해도 효율 높은 신기종가스터빈 이 설치되고 있는 상황에서 구기종을 상대로 정비 사업을 하고 있는 GT정비기술센터의 미래시장은 점차 축소될 전망입니다.


적자 탈출방안은

단기적으로는 2년간 부족 매출을 대체할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2017년 중점 추진한 터빈진단, 로터벤딩교정, 발전기Retrofit, 해외시장 확대 및 공장가동율 유지를 위한 저가수주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저가수주는 시장가격을 교란하는 부작용이 있으나 경쟁사 또한 우리와 같은 상황이므로 저가수주 정책을 추진할 것이며 발주사는 최저가 입찰제라는 카드를 꺼내들었으므로 시장논리와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대신 타 회사가 하지 못하는 사업에서 적자를 보존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하니 경쟁이 치열한 일부 사업은 저가정책, 경쟁력이 있는 일부 신수종 사업은 고가정책으로 시장에 런칭하여야 합니다. 이는 새로운 이론이 아닌 단순한 시장원리입니다.


중기적으로는 신기종가스터빈 제작사와 기술협력으로 해외반출 수리품목을 우리가 수리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일부직원들은 20년 이상 기술협력관계를 맺어온 GE와 결별할 수 없다고 하지만 실익이 없다면 결별할 수 있는 것이 비즈니스 세계입니다. GE가, 의리가 매출과 일자리를 보장해주지 않지요. 국내에서 기존 GE기종은 노후되어 가동률이 떨어진 상태이며, GE 신기종은 경쟁사인 MHPS 신기종에 비해 효율이 낮고 국내보급률이 떨어집니다. 국내 가스터빈시장에서 GE가 밀려나고 있는 상황에서 GE와의 의리만을 따지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GE만을 고집하다 앉아서 죽을 것인가? 새로운 회사와 기술협력, 신기술 습득 등 지난한 과정이 있지만 환경변화를 극복하고 우리는 변화를 넘어 혁신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GE/MHPS와 같이 갈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제작사가 보유하지 못한 기술을 개발하여 대등하거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제작사를 뛰어넘는단 말인가? 라는 반론은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으니 기술적 혁신뿐 아니라 사고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일회용품이 아닌 이상 고장이 발생했을 때 정비하지 못하는 제품, 고장수리가 안 되는 또는 어려운 제품은 시장에서 도태됩니다. 어떤 발전기가 널리 보급될까? 제작사도 고민하고 있는 사항 중 하나입니다. 제작사에서 고치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 신기종 발전기 일수록 정비기술이 완전치 않은 상태로 출고됩니다. 제작사가 수리하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고, 정비기간과 비용측면에서 우리 회사가 이길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시장잠식은 빨라질 것이며 우리 회사의 존재의미는 줄어들지요. 하지만 우리가 독보적인 정비기술을 개발한다면 제작사와 자연스러운 협업관계가 만들어 집니다. 남들이 변화할 때 우리는 더 빨리 혁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지요.


경영환경은 갈수록 악화됩니다. 살아남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능동과 수동의 문제이지만 우리가 환경을 조성하는 주체가 된다면 시나리오는 다시 만들어 집니다.


마지막 편지인데 죄송하게도 잔소리만 늘어놓고 갑니다. 2017년 시장상황이 좋지 않다고 예견했으나 예상보다 심각했습니다. 모든 식구들이 사업다각화, 시장다변화에 노력하지 않았다면 40억 원 정도 매출이 줄었을 겁니다. 2018년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어려운 상황이 펼쳐질 때마다 2017~2018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탈출구가 보일겁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니 GT센터 식구들 모두 풀꽃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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