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삼아 한 이야기에 거창하게 ‘論’을 붙였으나
본사 근무 직원이 보는 세상은 사업소 직원보다 크고 넓은데 이는 사람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업무에서 오는 차이이며 공부하게끔 끊임없이 숙제를 주기에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능력이다. 회사 예산을 집행함에 있어서도 사업소 직원은 1억을 집행하기 어려우나 본사직원은 10억, 100억을 집행해야 하므로 스케일이 다르다.
기술개발실에서 장비, 기술협력, 기술개발업무를 관장할 때의 1년 예산은 약350억 원 정도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1억의 예산을 집행해야 하는데 돈 쓰는 것은 돈 버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사업소 직원들은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이니 버는 것은 어렵고 쓰는 것은 쉽다고 할 수 있으나 써본 사람만이 돈 쓰는 어려움을 안다. 우리 회사에서 이렇게 돈을 쓰는 부서는 기술개발실이 유일하며 모든 직원들이 예산 집행시 신속함도 중요하지만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처, 실간 형평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예산을 지원해 주고서도 편파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투자금액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므로 적어도 예산 요청 부서 담당자만큼 알아야 하니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산집행의 투명성으로 이 부분은 예산집행의 시작이며 마지막이기까지 하다.
기술개발실 식구들은 단출해서 전체 식구들이 수시로 막걸리 한잔하며 세상사는 이야기를 했다. 샐러리맨들에게 정치, 종교와 축구이야기는 금기시되어 있으니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하다가 한 순배 술잔이 돌면 회사이야기를 하게 된다,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적이 있어 농담하면 농담으로 잘 받아치는 직원에게 막걸리 한잔 건네며 농을 던진다.
‘K과장, 납품업체에서 자기물건 사달라고 1억을 갖고 와서 청탁 하면 어떻게 할 거냐?’
‘에이, 안 받지요. 처장님 드리고 나면 남는 게 없는데요.’
‘그러면 10억을 갖고 와서 청탁하는 경우는 어떻게 할 거냐?’
사람인지라 답변에 시간이 조금 소요되는데 영민한 그가 곧바로 반격을 가한다.
‘그럼 얼마를 갖고 오면 받을까요?’
‘앞으로는 30억 미만을 갖고 오는 업체하고는 절대로 만나지 마라.’
‘왜 하필이면 30억입니까? 50억이면 50억이지.’
‘입사해서 30년 근무한다고 하면 회사에서 받는 월급만 30억이다. 마음 편하게 30억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다니는데 검은돈 30억을 받고 죄지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31억을 갖고 오는 업체가 있다면 같이 고민해보자. 내가 받을 것인지, 네가 받을 것인지 결정해야 하니까. 나는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받을지 모른다.’
우리 회사에서 구입하는 장비 중 고가에 속하는 장비가격은 5~60억 원이니 30억을 갖고 오는 업체 사장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검은 돈을 받지 말라는 지침을 줬으니 직원들은 반드시 지킬 것이다. 직원들은 내가 뱉은 말에 대해서는 ‘책임(?)’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책임(?)’의 의미란 지키지 않았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그리고 나는 업체 관계자가 우리 사무실에 방문하는 것을 싫어하니 쓸데없이 오고가게 하지 말고 가급적이면 전화로 끝내라. 부득이하게 방문하는 경우가 있다면 만나도 좋은데 칸막이 없는 공개된 자리에서 만나도록 해라.’ 부서 내에 있던 칸막이는 다음날 바로 없어졌다. 또한 직원들 소개로 장비를 납품하는 업체 사장님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가끔씩 연락하는 옛 식구들은 내가 이야기한 ‘30억’에 대해 ‘30억論’이란 명칭을 부여해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청렴을 강조하기 위해 농담 삼아 한 이야기에 거창하게 ‘論’을 붙였으나 온전한 직장생활을 하기 위한 방안이라면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명칭이다.
신문에 보도된 바와 같이 몇몇 직원들이 공금횡령을 저질러 사기혐의로 피소되었다. 이미 회사에서는 해고 등 중징계 처분이 내려졌지만 재판 후에는 실형이 선고됨과 동시에 미징계자에 대한 중징계 처분이 또다시 내려질 것이다. 그들도 한때는 산하 사업장의 직원들이었으니 사건이 발생된 것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있다. 처장 부임시 산하 직원들에게 ‘청렴’과 ‘신상필벌’을 더욱 강조했어야 했고, 그들에게 막걸리 한잔 건네며 ‘30억論’에 대해 이야기 해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