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노자 道에 딴지걸기(2), (김영사刊, 강신주著)
소통의 철학자, 장자
우리는 대개 선입견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선입견이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것은 맞으나 선입견이 없다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이해할수조차 없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면 영화 ‘러브스토리’를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입견은 일종의 先이해, 先판단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들은 한국의 공동체적 규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김치, 마늘을 먹고 어른을 공경하며 부모에게 효도하며 산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공동체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아버지의 머리를 톡톡치는 아들은 미국 공동체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으나 우리는 그 아이를 ‘버릇없고 예의 없는 놈’이라 평가 한다. 우리는 자신의 성심을 절대적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지만,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장자 소요유중에서-
자신이 유용하다고 생각한 모자가 월나라에서는 쓸모없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중국에서는 완성된 사람의 마음 상태를 거울에 비유했는데 양귀비를 만나면 미녀의 상을 갖게 되고, 추녀와 만나면 추녀의 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거울은 추녀를 만났다고 해서 그녀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성된 사람은 미녀와 추녀를 가리지 않고 어울리려는 의식을 구성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미녀를 만나 생긴 의식을 보편적인 기준으로 삼아 추녀에게 적용하고 추녀를 아름답지 않다며 외면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고착된 자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결국 그들은 현재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완성된 사람은 자기가 만난 타자의 타자성을 근거로 하여 다시 자신의 자의식을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 이 점에서 그의 자의식은 임시적이며 유동적이다. 왜냐하면 미래에 타자를 만난다면 그의 자의식을 타자에 맞게 재구성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성된 마음(成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기준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변화를 알아 마음으로 스스로 판단하는 자에게만 성심이 있겠는가? 우매한 사람에게도 성심이 있다. 아직 마음에 성심이 없는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하였다.’는 궤변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장자, 제물론-
장자가 문제 삼고 제거하려는 것은 성심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을 작동시키는 성심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사태’를 문제 삼는다. 즉 ‘특정한 성심을 표준으로 삼는 고착된 자의식’을 부정한 것이다.
어른과 어린아이 가운데 왜 어린아이가 더 빨리 외국어를 배울 수 있을까? 선 이해와 이해 지평을 없애는데 어린아이가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수영도 마찬가지로 수영교본을 여러 권 읽은 어른과 그렇지 않은 어린아이 중 누가 수영을 잘 배울 수 있을까? 이것도 어린아이다. 수영을 배우려고 물에 들어갔을 때 수영교본은 물과 소통하는 것을 방해한다. 어린아이는 자신을 물의 운동과 흐름에 맞추어 조절한다. 물과 소통하는 것은 내가 물속에서 수영을 하는 것이지, 수영교본이 수영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자, 국가와 제국의 형이상학자
전국시대는 춘추시대보다 갈등과 대립이 심해 어떤 제후도 천하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언제까지 국가를 통치할지 장담할 수 없는 시대였다. 이때 새로운 통치철학을 들고 혜성같이 나타난 자가 노자이다. 그 당시 통치권이 가장 우려하고 무서워했던 것은 피통치자가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것이었다. 노자 39장과 40장에 사회상과 저항의 원인을 진단한 내용이 나온다.
백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음으로써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백성가운데 옳지 못한 행동한 자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옳지 못한 행동을 하겠는가? -노자 39장-
백성이 굶주리는 이유는 통치자가 세금을 많이 거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이 굶주린다. 백성이 다스려지지 않는 이유는 통치자가 무엇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통치자가 지나치게 자신의 삶을 풍족하게 하려함이다. 그래서 백성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노자 40장-
쉬운 논리 같지만 노자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을 제시 했다. 국가의 원활한 기능을 위해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일종의 거래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금을 걷으면 자신이 아닌 국민들을 위해 사용하여야 상호 신뢰관계가 형성되고 국가 체계가 강건해 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주도 사람인지라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추우면 입고 졸리면 자야하며,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재물을 갖기 원한다. 하지만 군주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려면 보통사람과 같아서는 안 된다. 재분배를 하지 못하고 수탈만을 일삼아 민중봉기에 의해 사라져가는 군주들의 짧은 식견을 탄식한 것이다. 평범한 군주에게는 역설적일지 몰라도 ‘정말로 많이 갖기 위해서는 주어야 한다.’
노자는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고도 규정하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며 내성(內省,introspection)이라는 방법을 기초로 철학의 기본을 세웠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므로 늘 변하는 것에서 일정 법칙을 찾기 어렵다고 봤다. 성공과 실패, 보존과 멸망, 그로인한 행복과 재난으로 얼룩진 정치적 사건에는 필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중심인물은 당연히 군주였다. 맑음과 비움으로 자신을 지키고 낮음과 부드러움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군주의 통치술은 보편적인 역사법칙에서 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