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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축적의 길(1) (이정동著, 지식노마드刊)

벼룩 길들이기

by 물가에 앉는 마음

저자 서울대 이정동 교수님은 은사다. 서울대 에너지CEO과정에서 공부할 때 가르침을 받으며 연을 맺었고 내가 매주 보내드리는 편지를 받아 보신다. 새 책을 만드셨는데 내가 책을 좋아할 것 같다며 저서를 보내주셨다. 감사 하다. 과정을 이수한지 몇 해가 지났는데도 공부하라고 책을 보내주시니..., 이래서 스승은 평생 가르침을 주시는가 보다.

아침에 출근하여 책 펼치기 전 본사 근무하는 후배에게 메일을 보냈다.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들마다 전략을 내놓고 분주한데 우리는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일단 발제하여 각 분야의 생각을 들어보고 총론을 만든 후 각론으로 들어가 기술적 토의를 하는 것이 좋겠다. 사업소에서 지켜보니 나설 사람은 안 보인다. 당신이 발제하는 것이 좋겠다.’ 메일 보내고 책을 펼쳐보니 놀랍게도 4차 산업혁명 관련 내용이 보인다. 이것은 스승님의 혜안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부채도사인가?


들어가면서

90년대 말 타이거 마스크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술사가 있었다. 마술의 트릭을 관중들에게 공개하여 동료 마술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으나 트릭의 비밀을 알게 되면 상식적인 논리의 연결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엉뚱하게도 ‘기술혁신’을 키워드에 몰두하는 연구자로서 나는 늘 타이거마스크처럼 되는 것이 소망이다. 아이폰과 앱스토어가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워했고 스티브잡스는 넘볼 수 없는 차원의 창조적 인물로 간주되었지만 나는 혁신이 천상계의 주술 덕분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필연의 결과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다시 말하면 혁신의 비밀을 듣고 나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스티브 잡스와 같은 혁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돕는 것이 소망이다.

이를 위해 글로벌 혁신 선도 기업, 기술 선진국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또 다른 문제의식도 있었다. 지난 반세기 유래 없는 속도로 고도 압축 성장을 해온 한국은 기술혁신이론이나 글로벌 혁신 선도기업의 사례가 잘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유래 없는 속도로 인해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로 독특한 습관이 체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원인에 대해 나름의 방식대로 설명하는 것도 혁신연구자로서 감당해야할 의무인지 모른다.


나는 60년대 말에 태어나 ‘수출만이 살 길이다.’에 견줄만한 기막힌 표어를 지어내느라 머리를 쥐어짜면서 방학을 보냈다. 그 덕에 가족들은 지급도 집요하게 국산품을 찾는 내 유별난 습관에 익숙해져 있다. 수출 100억불을 달성했을 때 우리 집이 갑자기 부자가 된 것처럼 좋아했던 기억도 있다. 정말로 한 세대 안에 이처럼 눈썹이 휘날릴 만큼 급성장하는 경제 환경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한국인이 유일하다. 1,2차 오일쇼크와 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성징이 한두 해 후퇴했지만 보란 듯 극복했다. 지난 50년간 장기간의 경기침체는 상상도 못했으나 지금은 어렵다. 우리 산업과 경제에 빨간불이 켜진 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의 모습을 가늠할 혁신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성적이 좋다 싶으면 의사나변호사처럼 라이선스로 보장받는 직업을 선택하고 공무원, 공기업같이 안정적인 직업과 망할 것 같지 않은 대기업으로 몰린다. 인생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라는 이야기나 실패할 수 있으나 도전하는 삶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청년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는 청년들의 예측가능하고 합리적 선택인 것이다. 기업도 ‘도전’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민망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다. 획기적 신상품개발이나 실리콘밸리의 성공사례는 바다건너 이야기이며 현금을 손에 쥐고 소나기를 피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가득하다. 도전이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도전을 하지 않으니 성공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의 열풍은 우리나라 산업계에 또 다른 고민을 주고 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새에 선진국들과 중국은 인공지능, 빅데이터등 혁신의 키워드를 기반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턱턱 내놓고 있다. 날이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만 하다.


2015년 ‘축적의 시간’이란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스물여섯분야 전문가들의 기술개발분야 동향과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키워드를 탐색했다. 공통원인은 ‘개념설계 역량의 부재’였다. 특정 형태의 기술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나 ‘개념설계 역량’이 가진 독특한 특성, 즉 시행착오를 꾸준히 축적해 나가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축적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했기에 현재의 위기가 초래되었다는 인식은 굉장히 놀라운 것이었다. 책이 발간되자 산업현장에 부합되는 진단이라는 긍정적 반응과 축적의 부재는 성취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배제된 문제라는 부정적 반응도 나왔다.

SNS, 강연, 포럼 등 온오프라인에서 ‘축적의 시간’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공유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기술 분야가 아닌 법조, 언론, 교육, 문화 등 다른 분야에서도 축적이 부재하다는 점을 공감한다는 것이다. 문제 원인 지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 해결방안에 대한 답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산업분야별 특성이 다르기에 해답을 내 놓으라 할 때마다 분야마다 따로 고민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답변으로 얼버무려왔다.

이 책이 방향 제시에 그칠지 모르지만 해법의 단초 혹은 처방의 예시라도 모으고자 노력한 것으로 ‘축적의 시간’이란 책의 개정증보판으로 볼 수도 있겠다.


나가면서

데자뷔(기시감: 전에 봤던 장면이 그대로 반복되는 현상)의 반대말은 자메뷔(미시감: 익숙했던 일이나 갑자기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산업계는 미시감을 느끼고 있다. 기존에 하던 대로 선진국을 벤치마킹하고 야근을 밥 먹듯 해도 점점 모래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예전에는 발을 빨리 움직이면 빨리 빠져 나올 수 있었으나 이제는 이상하게도 빨리 움직일수록 더 깊이 가라앉으니 당황해 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미친 듯 달려들고 굼뜬 중국은 신형엔진을 장착하고 길을 비키라며 경적을 울리고 있다. 그간 너무 익숙해져서 편안하게 운전하고 있던 우리는 처음 보는 풍경에 화들짝 놀라 낯선 길에 들어선 초보운전자처럼 갈팡질팡하며 진땀을 흘리고 있다. 이제는 편안하게 느껴졌던 관행들이 유효하지 않다고 인정하며 이별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인터넷에 ‘벼룩 길들이기’라는 짧은 동영상이 있다. 벼룩을 유리병 속에 한동안 가두어 놓으면 뚜껑을 열어 놓아도 병의 높이 이상 뛰지 않는다. 병속에서 뛰다가 병에 부딪치는 아픔을 여러 번 겪게 되면 내면화의 한계가 생겨 부딪치지 않을 만큼만 뛰게 된다. 습관이 자리 잡으면 행동을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학계의 에피소드다. 우리도 시행착오를 장려하고 경험을 축적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면 지난 50년간 자리 잡은 빨리빨리 문화로 인해 어려울 것이란 이야기를 한다.

빨리빨리, 벤치마킹하며 실수 없이 실행하는 마음의 프레임은 지난 50년간 매우 효과적이었으나 습관처럼 각인되어 우리의 DNA가 그런 줄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독창적인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진정한 기술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상상과 희망이 필요한 시기이다. 마음의 유리뚜껑을 걷어 내고 부딪치기를 작정하고 뛰어 오를 수 있도록 사회의 틀을 축적지향으로 바꾸고 기술선진국의 마인드로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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