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 또 하나의 철 침대

‘프로크루스테스의 철 침대’를 만든 것이 아닌지 고민되는 부분이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오늘은 후배님들께 드리는 이야기다. 퇴직 즈음해 내려놓고 가야할 부분이 많다. 아시다시피 저는 현장 근무보다 본사에서 정책을 만드는 업무를 많이 했다. 물론 실패도 있었고 성공도 있었지만 회사 내 기술 관련 대부분의 정책에는 제가 관여했다고 할 정도로 기획업무를 많이 했다. 이는 새로운 개념과 패러다임을 많이 도입했다는 이야기와 같다. 하지만 내 자신이 기존 틀과 형식을 징그럽게 싫어하고 거부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한다고 하나 이것이 또 다른 형식의 제도와 틀을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틀의 교육훈련정책과 기술개발정책은 당시에는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산 교재를 번역하여 교육을 시행하던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커리큘럼을 개발했다. 우리나라 공교육을 받고 입사한 직원들이 알고 있는 지식수준과 ‘외제 커리큘럼’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지식수준이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고등학생들은 인수분해를 배웠는데 우리는 미, 적분을 배우고 입사했으니 다를 수밖에 없다. 미, 적분에 통달한 직원들에게 인수분해를 가르치는 것은 연수원이 인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보 만들기를 하고 있는 셈이니 바꿔야 했다. 연수원 교수들이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간단하다.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 - 학교에서 습득한 지식 = 연수원에서 가르쳐야할 지식’

산식으로 표현하면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빼기’인데 과정은 순탄치가 않다. 현장에서 정비에 필요한 지식을 파악해야 하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도 파악해야 한다. 그렇다고 미분방정식과 같이 범용되지 않는 이론은 가르칠 필요가 없으니 커리큘럼을 개발하기 위해 공대와 공업고등학교 교과서에 대한 공부와 분석을 시행했음은 당연하다.


기술개발정책도 ‘시장에서 외면하는 R&D’를 배격하고 판매가능하고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결과만 도출하는 ‘R&BD’개념을 도입했을 때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R&D효율을 높이고자 ‘중간진입전략’을 도입했을 때도 마찬가지 였다. 짧은 한 줄에 지나지 않지만 연구조직에서 보면 태산보다 무거운 짐이자 부담되는 사건이다. 일부 연구원들은 연구를 빙자한 학위취득논문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기업 연구결과는 매출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간단하고 단순한 명분과 논리가 만들어지면서 반발을 잠재웠다. 그러기에 모든 전투에서 이기려면 그 누구와 논쟁을 벌여도 깨지지 않을만한 굳건한 명분을 바로 세워야 한다. 학술적 연구는 국책연구기관과 학교에서 수행하고 사업화 연구는 기업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 분명함에도 우리 회사의 R&D정책방향 자체가 모호했던 것이 사실이다.


90년대 말 산자부주관으로 ‘원전기술 고도화계획’을 수립할 때, 산자부에서 대학교수들에게 용역을 주어 원자력분야 운영기술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연구했는데 결과가 실천적이지 못했다. 산자부에서 전력그룹사로 검토 의뢰해 전력그룹사 TF가 구성되어 참여하게 되었다. 고도화계획 컨셉을 잡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결론은 실용화기술을 어떻게 개발하고 고도화 시킬 것인가 였다.

과기부가 R&D자금을 주관하고 있지만 산자부 불만은 과기부가 현장적용을 하지 못하는 기초연구결과만 양산하는 것이었다. 물론 기초과학 연구가 필요 없다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연구를 토대로 어떤 실용기술을 개발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데 실제는 달랐다. 현장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은 연구개발능력이 부족하고 연구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은 현장적용능력이 부족한 시기였다. 현재는 학교에서도 현장과 연구능력을 겸비한 교수들이 많아 실용화기술을 개발하여 벤처기업을 만들고 성공하는 사례가 많지만 당시 상황은 달랐다. 산자부가 만족하고 칭찬한 계획은 실행에 옮겨져 전력그룹사에 많은 R&D자금이 지원되었고 개발즉시 현장에 적용 가능한 기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안전관리 정책 또한 기존의 무조건 적인 ‘무재해 달성’이라는 개념을 부셔버렸다. 입으로는 무재해를 표방하고 있지만 매년 20명이 다치거나 사망하는 현실인데 말로만 ‘무재해’를 외친다는 것은 무의미 까지 하다. 창사이후 500여개의 안전사고사례를 심층 분석한 결과, 우리 직원과 외부 인력 사고비율이 반반이었으므로 지속적 교육과 보완이 가능한 직원에 대한 산재예방은 가능하나 법정교육만 건성으로 이수하고 투입되는 외부 인력에 대한 ‘무재해’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대신 예방하고 피할 수 있는 재해를 예방하는 차원의 ‘3대 재해 근절’을 기치로 내걸고 재해를 줄이는 쪽을 선택했다.

실천적 방안이 제시되고 난후 재해인원은 10명 이하로 줄었고 적게는 재해 인원이 3명으로 감소한 해도 있었다. 매년 20명의 산재환자 발생에서 3명으로 사고가 감소되었으니 성공한 정책 중 하나다.


3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후배님들은 제가 만든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 물론 저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셔야 하며, 이제는 후배들이 저를 밟고 가는 정책 개념과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세계 제일의 연수원이라는 캐나다 브루스원자력연수원에 3개월간 출장 가서 매일 밤늦게까지 끝장 토론을 했다. 이곳 설비와 교재를 카피해서 똑같은 연수원을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2개월이 지나자 본질을 파악했다. ‘우리 현장에서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내용을 가르치는 연수원을 만들어야 한다. 브루스원자력연수원이 세계 제일의 연수원이라고 명성을 얻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본질을 파악해야 근본적인 원인이 제거되고 임시방편적인 정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난 기간, 기존 틀을 거부하며 완벽하고도 새로움을 창조하는 기획 업무를 했다고는 하지만 이것 자체가 자기 주관에 맞는 제도와 틀을 만들어 다른 사람의 발을 절단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철 침대’를 만든 것이 아닌지 고민되는 부분이다. 기존 관념과 자기 주관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며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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