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실 구형보다 형량이 높은 파격
아이들을 키우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인지하는데도 속칭 쉰세대인 아버지세대는 옛날 방식대로만 살아가니 변화 속도를 체감 못하고 둔감하게 산다. 최신형 스마트폰의 각종 어플리케이션도 별로 사용하지 않으니 폴더 폰을 사용하는 것과 진배없고 자동차 전자편의장치도 100% 활용하지 못하니 겉모양만 신형이지 구형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셈이다. 이처럼 쉰세대 대부분은 디지털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나로그적인 삶을 살고 있다.
작은 아이가 대학생이며 엄마 신용카드를 사용한다. 계산 내용을 보면 치킨집에 가서 만원, 중국집 가면 6천원을 결재하곤 해서 어떻게 치킨집에서 만원만 결재하냐? 친구가 없니? 물으니 친구하고 같이 먹었는데 ‘더치 페이’를 해서 그렇단다. 그래도 네가 내야할 때는 계산하라 했더니 생일이나 좋은 일이 있어 한턱 낸다고 공지하지 않는 한 ‘더치페이’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대답 한다. 그렇다. 세상은 많이 변했는데 우리 세대는 아직도 옛날을 살고 있다. 동료들과 또는 동창들과 저녁을 같이 하면 눈치껏 아직 수입이 괜찮은 사람이 계산하거나 술에 취해 손 빠른 사람이 먼저 계산을 하고는 다음날 아침 속 쓰려 하는 구세대가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서울시 진보교육감이 선거과정에서 흑색선전을 한 혐의로 고발되었고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배심원 재판을 청구하였으나 본인 예상(?)과 달리 당선 무효형을 배심원단이 결정하고 재판장이 확정하였다. 선출직 교육감이었기에 당혹스러운 배심원판결을 놓고 강하게 반발할 처지는 아니었다. 배심원 판결이 아닌 법원 판결로 같은 결과가 선고 되었다면 ‘법은 죽었고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한 사법부’라는 맹비난의 목소리가 커졌을 것이나 국민 의사가 반영된 판결이라 후유증이 적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연배의 서울시 교육감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간과했을지 모른다.
우리 회사 인사위원회는 법원의 배심원 재판제도와 흡사하다. 비위건에 대해 조사하는 감사실은 검사와 같은 역할을 하여 양형기준에 맞게 구형을 한다. 인사위원들은 배심원 역할을 하여 과연 구형량이 적정한지 판단하고 선고량을 적어내면 재판장 역할의 인사위원장이 평결하게 된다. 극히 민주적 절차이나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에 대한 인사위원회에서는 인정상 감사실 구형보다 한 단계 낮은 선고량을 적어내는 것이 아직까지의 관례였고 당연한 우리 회사 문화였었다.
사업장 비리로 인해 인사위원회에 후배인 팀장, 입사동기 사업소장 둘이 피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하청업자에게서 촌지를 받아 유용한 것이 발각 되어 현장책임자인 팀장과 전직 소장 두 명이 인사위원회에 출석했다. 사실 징계를 위한 인사위에는 피고인 자격의 직원들은 참석하지 않는 것이 통례이며 인사위원들도 참여하길 꺼린다.
직접당사자인 팀장은 나름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관리책임자인 한명의 소장은 퇴직을 2개월 앞두고 있었으나 부하팀장이 해고조치를 받는다기에 원죄는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진술하기 위해 참석했다. 다른 한명의 소장은 ‘기억이 가물거린다.’며 국회청문회와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같은 동기 입장에서 얼굴이 화끈 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금전수수는 죄질이 나빠 감사실 양형기준에 따라 현장팀장은 해고가 결정되었다. 모르쇠로 일관한 소장은 인사위원회에 출석해서도 부하 팀장 보호는 커냥 본인 안위만 걱정하는 진술을 하여 인사위원들을 실망시켰다. 소장의 선량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인사위원들이 감사실 구형보다 가중처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부하직원을 살리기 위해 창피함을 무릅쓰고 인사위원회에 출석한 소장은 감사실 구형보다 낮은 수준으로 선고되었다. 비리와 관련되었지만 부하직원에게 죄를 미루지 않은 리더십이 선고에 영향을 주었다. 물론 인사위원들은 형량에 대해 협의를 할 수 없으나 삼십년 넘게 근무한 인사위원들은 분위기로 의사를 소통하는 능력이 있다.
인사위원들이 가중처벌을 결정한 이 부분은 전례 없었던 일로 감사실도 당황스러운 대목이나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검찰의 구형보다 판사가 중형을 선고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인데 내 자신도 이런 경우는 처음 들어봤고 겪어봤다,
인사위원회 개최 전, 피고인과 입사 동기들이 인사위원으로 많이 들어가니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는 직원들도 상상하지 못했다. 팔이 안으로 굽으니 동기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완전 뒤집혔다. 동기들이 인사위원으로 들어갔는데도 감사실 구형보다 형량이 높은 파격이 일어났으니 세상은 많이 변한 것이다.
감사실 직원들 명함에 새겨져 있는 ‘청렴韓 KPS’라는 로고가 생각나 끄적거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