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것과 마주하다.
공자 말씀은 많이 읽었는데 장자 말씀은 두 번째 책을 읽는 것 같다.
공자말씀이 교과서적이고 학교교육 같다면 장자말씀은 자연에서 배우고 체득하는 야외교육 같은 기분이다. 공자 사상이 잘 가꿔진 일본식 정원 같다면 장자의 사상은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한국식 정원이 아닐까 한다.(책 한권 읽고 건방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추후 말이 바뀔지 몰라도 이런 기분으로 장자를 읽기 시작한다.)
저자의 들어가는 말에서
물질은 풍족한데 정신은 공허한 시대다. 오늘날 어디론가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데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는 모른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달리니 나도 달리고 남들이 열심히 산다하니 나도 열심히 살뿐이다. 남들이 달릴 때 달리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것 같고 남들이 일할 때 나만 놀고 있으면 왠지 불안하다. 현대인에게 ‘나’는 없다. 나의 주체적인 삶, 나의 자유로운 삶은 실종된 지 오래다.
장자는 2300년 전 지위도 재물도 없이 궁핍한 삶을 살던 별 볼일 없는 자연인이며 재야지식인이다.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살았던 장자는 세계화, 정보화, 무한경쟁, 고도산업화시대를 혼란스럽게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 온다. 장자는 잃어버린 ‘나’를 찾게 하여 주체적이고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준다. 그 과정에서 매미나 비둘기가 되지 말고 대붕이 되라고, 새장에 갇힌 살찐 꿩이 아닌 먹이를 찾아 헤매는 고달픈 꿩이 되라고 속삭여 준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어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 할 수 없다. 한철에 매어살기 때문이다. - 장자 외편 추수 -
제1장 自由, 낯선 것과 마주하다.
장자의 첫 편은 逍遙遊(소요유)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소요유는 장자 철학의 궁극적 지향점을 암시하고 있다. 서양 학자들은 소요유를 ‘행복한 방랑’,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기’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그 무엇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마음의 절대적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절대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낯선 것과 마주침’이라는 특별한 여행이 필요하다. 일상성 속에 갇힌 사람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익숙함에서 벋어나기 어려우나 기존의 것들과 거리를 두고 모험 같은 여행을 해야 비로소 자유에 다가설 수 있다.
수천리 크기의 ‘곤’이라는 물고기가 변해 수천리 크기의 ‘붕’이라는 새로 변해 9만 리 상공으로 날아 올라가 6개월간 내려오지 않는다. 황당하고 상식을 초월하는 신화적인 이야기로 말문을 뗐을까? 충격요법으로 상식의 파괴를 의도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좁은 세계관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다. 장자가 살던 시기는 제자백가라고 하는 온갖 사상가들이 자기 사상만이 최고의 진리라고 외치던 시대이나 장자가 보기에는 우물 안 개구리 였다. 유가, 묵가, 법가니 이름만 거창할 뿐 하나만 알고 전체를 모르는 그들을 좁은 우물에서 망망대해로 인도하고자 했다. 물고기가 새로 변하고 물에서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변화로 기존의 구속과 한계를 벗어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장자는 한 줌의 부와 권세로 위세를 과시하는 당시의 사람들에게서 곤의 가련함을 보았을 것이다. 부와 권세를 누린다 해도 그것은 외적인 거대함에 불과하다. 내면의 변화, 영혼의 질적 상승이 없는 사람은 평생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사람이다.
매미와 비둘기가 붕새를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힘껏 날아봐야 느릅나무 정도에 다다를 뿐이다.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떨어지는데 저 붕새는 무엇 때문에 9만 리를 날아올라 남쪽으로 가는가?’
가까운 교외로 놀러가는 사람은 세끼 식사만 하고 돌아와도 배가 부르다. 하지만 백리를 가는 사람은 밤새워 곡식을 찧어야 하고, 천리를 가는 사람은 석 달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한다. 그러니 저 매미와 비둘기가 어떻게 붕새의 거대한 비상을 이해하겠는가?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이르지 못하고 짧은 삶은 긴 삶을 헤아리지 못한다.
곤이 물에서 나와 붕새가 되고, 붕새가 구만리를 날아 올라가는 것은 정신 경지의 변화를 이야기한 것인데 변화에는 4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세속적 단계로 그 앎이 벼슬자리 하나 맡아 나라를 다스릴만한 사람 정도로 세속적 관점에서 볼 때는 모두 부러워할만한 자리이다. 그러나 매미와 비둘기 정도의 존재로 ‘작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宋榮子(송영자)의 단계로 주관이 뚜렷하여 남의 말에 쉽게 휘둘리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일을 결코 하지 않는 단계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도 우쭐하지 않고 온 세상 사람들이 비난해도 낙담하지 않는다.’
세 번째는 列子(열자)의 단계로 세상의 가치와 관념에 얽매이지 않지만 완전한 자유로움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단계이다. 네 번째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소요유의 단계이다. 나에 대한 의식과 집착에서 벗어난 無己, 타인에게 무언가 이루어 주고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無功,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 無名의 삶을 사는 단계이다.
제2장 是非, ‘옳다’ ‘그르다’의 덫에서 벗어나다
조삼모사는 간사한 꾀로 남을 희롱하거나 속이는 행위나 말을 뜻한다. 하지만 본뜻은 좁은 시야에 갇힌 원숭이들의 어리석음을 이야기 한 것으로 우리들의 모습을 이야기 한 것이다. 원숭이들은 成心(성심)이라는 견고한 성에 갇혀 있는 것이고 나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봐서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는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옳다, 그르다’라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바라보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兩可的(양가적)인 전향적 사고가 필요하다. 황희 정승이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오니 하인들이 다투고 있었다. 하인A가 사정을 호소하니 ‘너의 말이 옳다’하인B의 말에도 ‘너의 말도 옳구나.’ 하인C가 기가 막혀 A도 맞고 B도 맞는다니 대감마님 정신이 잘못된 것 같다고 하자 ‘듣고 보니 너의 말도 옳구나.’ 이에 다투던 하인들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한바탕 웃고 말았다.
유명한 현인이었던 설결이 왕예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물었다.
‘선생님은 누구나 동의하는 절대기준을 아십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선생님은 자신이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아십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
‘그렇다면 사물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그러나 내가 시험 삼아 말해 보도록 하지.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인 줄 어찌 알겠는가? 또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정말로 아는 것인 줄 어찌 알겠는가?’
내 그대에게 물어보겠네.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지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사람은 높은 나무에 올라가면 벌벌 떨며 무서워하는데 원숭이도 그러한가? 사람, 미꾸라지, 원숭이 중에 누가 바른 거처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옳고 그름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 백가쟁명의 시대, 모두가 자기 사상이 옳다고 했지만 장자는 그런 소아적 태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