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 장자, 나를 깨우다2 (이석명著, 북스톤刊)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고 추구해야할 가치는 무엇인가?

by 물가에 앉는 마음

제3장 價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사이에 머물다.

장자에 대한 비판 요지는 “당신의 말은 너무 허황되다.”였다. 말에 현실성이 없어 삶에 도움 되지 않는 쓸모없다는 뜻이다. 장자의 친구인 혜자(중국 고대철학의 한 유파인 명가의 대표)가 말했다. “나에게 커다란 가죽나무가 있는데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하여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있지만 목수도 거들떠보지 않네. 그대의 말은 크기만 할뿐 쓸모가 없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거라네.” 장자가 답했다. “자네는 저 큰 나무의 쓸모없음을 걱정하고 있는데 그 주위를 일없이 배회하거나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지 않는가? 그 나무는 도끼에 찍힐 일도 없는데 어찌 쓸모없음을 괴로워한단 말인가?” “천지는 넓고 크지만 사람이 다닐 때 필요한 부분은 단지 발바닥 넓이 정도지. 발 부분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을 쓸모없다고 깊이 파 황천에 이르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러기에 쓸모없음이 쓸모 있다는 것이네” 쓸모에 대한 인식의 확장하여 당장의 쓸모보다는 잠재적인 효용성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쓸모 있음과 없음”의 기준은 무엇이고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유능한 목수인 장석이 제나라로 가다가 사당나무로 있는, 소 수천마리를 덮을만한 커다란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이 나무를 보기위해 구경하는 사람들이 시장바닥처럼 바글바글 했지만 장석은 눈여겨보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장석의 제자가 물었다. “ 수십 년 목수생활을 하면서 저 나무처럼 훌륭한 나무를 본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왜 거들떠보지도 않고 길을 재촉하셨습니까?” “저것은 쓸모없는 나무다.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그릇을 만들면 깨진다. 저 나무가 재목이 되지 못하니 저토록 장수할 수 있는 것이다.” 장석이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는데 사당나무가 꿈에 나타나 물었다. “그대는 나를 무엇에 비교하려는가? 세상 사람들이 좋은 나무라 하는 귤나무 배나무는 열매가 익으면 찢겨지고 당겨져 삶이 힘들어 지는 것이네 그래서 타고난 생명을 더 누리지 못하고 중간에 요절하니 세상살이에서 스스로에게 타격을 가하는 셈이지. 대부분의 사물이 이와 같네. 나는 오랫동안 쓸모없는 존재가 되길 바랫고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뜻을 이뤘네. 이것이 내 자신에게 큰 쓸모가 된 것이지. 또한 그대나 나나 한낱 사물에 불과한데 어찌 사물이 사물을 평가한단 말인가. 그대같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없는 인간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안단 말인가!”


장석은 목수의 관점에서만 나무를 바라봤기에 사당나무의 비난을 초래했다. 사당나무는 자신이 평생 쓸모없음을 추구했다고 하나 쓸모없다고 외면한 장석이 미웠다. 장석이나 사당나무는 모두 동등한 사물에 불과하다고 동등한 가치를 부여한 장자의 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우연한 사건일 뿐이고 다음 생에는 개나 나무로 태어날 수 있으니 인권도 중요하고 물권도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현대는 사물이나 사람까지도 경제적 가치로 평가되고 있고 고유의 존재가치는 무시되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스펙을 쌓아 상품성을 높이고 있으나 “나”의 존재가치는 없다. “나”는 상품성이 떨어지면 없어지는 소모품이 되는 현실을 2천 년 전에 장자는 경고했다.


제4장 不具, “갖추지 못한 자의 온전함을 보다.”

장자에는 난쟁이, 외발이 등 비정상적인 존재, 비정상적으로 큰 나무, 정신적 불구라 할 수 있는 미치광이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존재들이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정치가, 지식인들과 달리 삶이 무엇인지, 소중한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고 덕이 높은 존재로 그려져 있다. 장자가 이들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장자 본인이 철저한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이다. 가장 친한 친구인 혜자로부터 허풍쟁이 취급을 받았으나 권력자에게 머리를 굽히기보다 열 걸음 백 걸음을 걸어 겨우 한번 먹이를 쪼아 먹는 꿩의 고달픈 자유를 선택했다.

“신도가”는 형벌로 다리가 하나 잘린 사람이다. 재상인 “장자산”과 같은 스승을 모시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자산이 신도가에게 말했다.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는 남아 있도록 하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남아 있도록 하세.” 다음날 신도가와 장자산이 또 같은 방에 들어가 함께 있게 되자 장자산이 신도가에게 말했다. “지금 내가 나가려는데 자네는 머물러 있겠는가? 아니면 나가겠는가? 자네는 재상인 나를 보고도 피하지 않으니 지금 재상과 맞먹겠다는 건가?”

산도가가 말했다.

“선생님 문하에 이처럼 재상이니 뭐니 하는 게 있었던가? 그대는 재상자리에 우쭐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이로군. 거울이 맑으면 먼지가 앉지 못하고 먼지가 앉으면 거울이 맑지 못하네. 현인과 함께 있으면 허물이 없어진다 했는데 선생님을 받들면서 이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뭔가 잘못된 것일세.”

정자산이 말했다.

“자네는 형벌을 받아 그 꼴이 되었는데도 요임금보다 훌륭해지려 하는군. 자네 처지를 보고 반성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신도가가 말했다.

“자기 잘못을 돌이켜 보면서 부당하게 형벌을 받았다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 잘못을 돌이켜보지 않은 채 요행히 형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부당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무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편히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덕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지. 내가 선생님 문하에 머문지 19년이나 되었지만 선생님은 내가 외발이 인지 모르네. 자네는 나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군.”


제5장 養生, “마음의 두께를 없애다.”

장자는 “양생”을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면서 오래 사는 방법”이 아닌 때에 맞게 행동하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으로 해석했다. 인간은 육신과 시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데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인위적 행위로 삶을 망치게 된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지식은 무한하다. 유한한 삶으로 무한한 지식을 쫓으면 위험하다. 그런 줄 알면서 계속 지식을 추구하면 위태로울 뿐이다. 좋은 일을 하더라도 이름이 들어나지 않도록 하고 나쁜 짓을 하더라도 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해라. 오직 中의 이치에 따라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극단에 치우치지 말라는 충고다. 극단에 치우치는 것은 知가 개입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中은 다른 의미로 虛(허)로 마음을 비우라는 것이다. 유한한 삶으로 무한한 지식을 쫒아가는 것도 욕심이고 좋은 일, 나쁜 일을 하려는 것도 욕심이다. 욕심을 덜어내어 마음의 두께를 얇게 해야 한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재물을 소유해 호의호식하는 삶은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지만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많은 재물을 소유하기까지에는 포기해야 할 것이 적지 않다. 자존심, 체면을 구기고 자기 뜻대로 사는 자유로움을 포기해야 하며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구차함을 감당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해 선거철이 되면 유권자들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영혼까지 팔아 겨우 권력을 손에 넣는다. 사업가들은 이권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굽신거리며 향응을 제공하여 재물을 손에 움켜쥔다. 눈과 입은 웃고 있지만 잘 차려진 제사상위의 돼지머리와 다를 바가 없다. 자신들이 그런 공허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할뿐더러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하며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고 추구해야할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중요한 것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라 하지만 내차와 남의 차를 비교하고 내가 사는 집과 남이 사는 집의 비교하며 주식의 등락에 웃고 울며 좋은 음식과 인맥 찾기에 바쁘다. 이런 행위 어디에 내면이 있는가? 내면을 중시하다 외면을 놓치는 것도 문제지만 외면을 중시하다 내면을 잃는 것은 더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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