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워 마음을 닦는다
제6장 命, “자연의 흐름 안에 편히 머물다.”
공자는 천명을 중시하며 50세가 되어서야 천명을 알게 되었다(知天命)고 고백했다. 삶과 죽음은 命에 달려있고 부유함과 귀함은 天에 달려있다 했다. 장자는 천명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단지 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힘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명이라고 했고 이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장자의 이러한 태도는 얼핏 운명론자처럼 보이게 하나 장자가 말하는 ‘명’의 본질은 ‘자연’이다. 자연계는 물론이고 인간사의 모든 일도 자연적인 흐름에 따라 진행된다고 봤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딪치는 고단한 삶에도 자족하여 순응하는 安命(안명)의 삶을 살았다.
세상을 살다보면 종종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입사시험 낙방, 직장에 열정을 바쳤는데도 승진누락, 애지중지 키운 자식의 불효, 평생 근면했는데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 시한부 삶의 선고 등 이러한 일이 현실화되면 일단 원망할 대상부터 찾는다. 원흉은 누구이며 상사에게 아부한 동료, 사회구조의 불평등, 신에 대한 원망 등으로 술에 의존하게 되어 건강을 더욱 해치게 된다. 원망, 비탄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원망하면 나의 억울함이 줄고 아픈 마음이 치유되는가?
장자는 이런 경우 ‘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편안히 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덕의 지극함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제7장 生死, ‘죽음을 받아들여 죽음을 극복하다.’
우리 삶은 매순간 무수한 불확실성의 터널을 통과하므로 미래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터널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삶이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중국 철학사에서 장자는 죽음에 대해 본격적인 사유를 시작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므로 밤과 낮이 찾아오는 자연현상과 같으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 삶을 얻었다고 크게 기뻐할 일도 아니고 죽음에 이르렀다 해서 크게 슬퍼할 일도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분별적 사고에 갇혀 있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한다. 이러한 사고의 연장에서 삶은 좋고 죽음은 나쁜 것으로 차별한다. 하지만 삶은 죽음의 또 다른 모습이고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모습이다.
노자가 죽자 ‘진일’이란 사람이 조문을 와서 단지 세 번 곡을 하고 나왔다. 노자의 제자가 ‘선생님의 친구이면서 대충 조문을 해도 됩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진일이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노자의 참된 제자인줄 알았으나 지금 보니 아니다. 노인네들은 자식을 잃은 듯, 젊은이들은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나 노자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세상에 태어난 것은 선생이 올 때가 된 것이고 세상을 떠난 것은 갈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순리를 받아들이고 따르면 슬픔과 기쁨이 끼어들 수 없다.’
(노자는 생존연대가 불확실한 신비의 인물이며 상기 이야기는 장자가 지어낸 것으로 장자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제8장 修養, ‘마음을 비워 마음을 닦는다.’
전통적으로 동양의 학문은 지식 축적보다는 마음공부를 중요시 했다. ‘修養(수양)’은 ‘닦고 기르다.’인데 대상이 ‘마음’이다. 특히 유가의 수양론은 마음을 잘 보살피고 길러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데 장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장자는 인간의 마음은 욕심으로 흐르기 쉽다고 판단하여 ‘마음 기름’이 아닌 ‘마음 비움’을 중요시 했다. 장자 철학에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욕심, 편견, 아집, 집착, 왜곡 등을 털어내어 마음을 비워야하고 그 비움마저 잊어버린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야 사물의 본래 모습이 보이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절대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안희’가 ‘공자’에게 위나라로 들어가 포악한 군주를 계도하고 고통 받는 백성을 구제하겠다며 작별인사를 하자 공자는 ‘齋戒(재계)하라’며 말렸다. 안희가 그간 술도 먹지 않고 재계했다 하자 공자가 ‘그것은 心齋(심재), 즉 마음의 재계가 아니라 했다. 공자는 마음의 뜻을 하나로 모아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氣로 들어야 할 것이다. 마음은 자기 마음에 부합되는 것에만 그치니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기로 들어야 한다. 마음을 비우면 心齋에 이르게 될 것이다.’
도를 깨우치는 과정은 外天下(외천하: 출세, 명예를 잊는다.), 外物(외물: 물질적 욕망을 잊는 것), 外生(외생: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 朝撤(조철: 조철은 아침에 여명이 터지는 광경을 시각적으로 비유한 것으로 수행자가 첫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말한다), 見獨(견독: 절대 경지 또는 사물을 관조할 수 있는 단계), 無古今(무고금: 시간의 변화에 마음을 쓰지 않거나 시간의 변화에 자신을 맡기고 함께하는 것), 不死不生(불사불생: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 않아 삶을 기뻐하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달관의 경지)
제9장 眞人, ‘변화하되 변화하지 않는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이상적 인격체는 ‘眞人’이며 현대적 표현으로는 ‘참된 사람’정도가 된다. 진인이 되기 위해서는 각고의 수양이 필요하다. ‘나’에게 집착하는 나를 버려야 하며 ‘나’를 버린 그 자리에 절대 경지를 보는 ‘또 다른 나’를 위치시켜야 한다. 참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으나 내면에 ‘옥’을 품고 있어 비록 겉은 초라하나 가슴속에는 찬란한 옥을 품고 있다.
진인은 사소한 것이라 하여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이룬 게 있어도 뽐내지 않았으며, 인위적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지 않았다. 잘못된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았고 일이 잘 되어도 스스로 이루어 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삶을 기뻐하지 않고 죽음을 싫어하지 않았다. 세상에 나와도 좋아하지 않았고 저세상으로 돌아가게 될 때도 거부하지 않았다. 홀연히 오고 홀연히 갈뿐이다. 이는 그의 앎이 높은 도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장자가 어떻게 살았는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난한 지식인이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화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불구자, 죄인, 백정등 사회적 소외계층으로 자신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오히려 권력자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우화를 통해 기득권 세력을 조롱하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세상을 거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