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예의지국에서는 얼굴을 대면하면 강했던 마음이 흐물흐물하게 변한다.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oo차 차주 되시죠? 혹시 보험회사나 가해차량 운전자 전화를 받으셨는지요?’
‘아니요.’
순간 아침에 주차한 곳을 떠올려보니 차량 사고가 발생하기 어려운 위치에 주차했기에 보이스 피싱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전화하신 분은 아침 출근길에 접촉사고를 목격했는데 가해자가 내려서 확인도 안하고 가기에 가해차량 번호를 메모했다가 혹시나 해서 전화 했단다.
확인해보니 접촉사고가 맞았다. 범퍼 도색이 조금 벗겨지고 스크래치가 발생했다.
건물 관리실에 차량조회를 부탁했고 운전자 전화번호도 파악되었다.
가해자에게 전화했다.
‘오늘 아침 6시 45분경, 차량 접촉사고 내고 가셨는데 보험신고 하셨습니까?’
연배 있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삐 출장 가느라 깜박했습니다.’
깜박했다는 것을 보면 사고를 인지했다는 이야기다.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으며, 경찰과 보험신고도 하지 않았고 피해자에게 전화도 하지 않았으니 고의 도주의도가 다분해 보여 더욱 괘씸했다.
‘깜박한 것은 당신 사정이고 연락처, 보험사, 경찰신고 등 아무런 조치 없이 현장을 이탈했으므로 법적으로 완전한 뺑소니 사고입니다. 뺑소니로 경찰에 신고합니다.’
‘좌송합니다.’
‘보상능력이 안되어 도망갔다면 운전을 하지 말아야지 왜 운전을 하고 다녀요? 차량 교체해줄 능력은 되요?’
‘죄송합니다. 같은 건물 입주민이니 봐주십시오. 지방 출장 중이니 내일 찾아뵙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럴 것 없어요. 사고 난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으며 신고도 하지 않았지요. 뺑소니 범인데 같은 건물 입주자니까 봐달라니? 같은 건물 입주자라도 일면식도 없고 앞으로 만날 필요도 없어요. 양심불량인 사람과는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인명사고 내고도 도망갈 사람이네.’
쏘아붙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뺑소니 신고를 위해 6하 원칙에 따라 사고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 중 관리사무소 직원이 전화했다.
‘가해자는 점잖으신 분입니다. 경찰신고는 재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교통사고 뺑소니 범이 점잖다니요? 파렴치 하지요. 관리사무소에서 그 분을 어떻게 알고 점잖다 하시죠?’
‘오래된 입주자이며 가끔 뵙는 분인데 정말 점잖으십니다. 경찰신고만은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흐른 뒤 가해자가 문자를 보냈다.
‘내일 10시 찾아뵙겠습니다. 죄송하고 심려 끼쳐드려 면목 없습니다.’
다음날 10시 정각, 가해자가 찾아왔다.
70세 넘은 연배에 허리는 구부정하며 외모는 점잖아 보이신다. 그러면 안 되는데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사고 당시에는 접촉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습니다. 늘그막에 실수를 하게 되어 면목 없습니다.’
전화 받고 본인차를 확인해 보니 접촉사고를 낸 것이 확실하단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처리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보험신고 하시고 접수번호 알려주세요.’
‘경찰신고는 안했지만 내 차 보험사에는 뺑소니 사고로 접수만 하고 보류시켜 놓았습니다.’
‘선생님 보험사에서 내 과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나 불만족스럽게 나오면 접수시킨 내 보험으로 처리하겠습니다.’
‘또한, 뺑소니 사고인 만큼 내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사고 차 몰고 서비스센터를 오고가기 싶지 않아 pick up & delivery 서비스를 받을 겁니다. 관련 비용이 보험처리 되지 않는다면 영수증 청구 하겠습니다.’
‘차량 렌트비는 보험사가 처리해 줄거니 신경 쓰실 필요는 없고 불편한 것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뺑소니 신고는 하지 않더라도 강한 정신교육을 시키려던 마음이 가해자 연배와 태도를 확인하곤 수그러들었다. 법은 법이고 예의는 예의인데 동방예의지국에서는 얼굴을 대면하면 강했던 마음이 흐물흐물하게 변한다.
사고를 알려준 고마운 목격자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선물해줬다. 목격자 선물 값도 가해자에게 청구해야 하는데 청구하지 못했다.
ps. 공교롭게도 가해차량 운전자와 같은 층 사무실을 이용하고 있다. 오다가다 만나는 가해자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바닥을 보며 주눅 들어 있는 듯하다. 이래서 죄 짓고는 마음 편히 살지 못한다고 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