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1) (강신주著, 동녘刊)
머리말
‘깨끗이 씻어,’ ‘공부 좀 해라.’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서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우리의 조바심을 조롱하듯 별다른 노력도 없이 나이를 먹으니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었지만 슬프게도 우리에게 힘과 자유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힘과 자유는 사치라고 보일 정도이며 오히려 신경 써야 할 것, 눈치 봐야 할 것들이 늘어나 하루하루가 버겁기만 합니다. 그래서 한숨이 나옵니다. 겉만 어른이지 속은 그대로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권력자가, 자본가가, 직장 상사가, 시댁 식구가, 혹은 길거리에서 만난 타인들이 내게 암암리에 명령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건 하지 말아요.’ 심지어 후배나 아이들의 눈치마저도 봐야하니 나보다 나이 어린사람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때도 있습니다.
마침내 알아버렸습니다. 옛날 부모님들도 사실 어른이 아니었다는 슬픈 사실을요. 나이를 먹었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없다면 어른이라고 해도 어른일 수 없는 법이니까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아야 어른입니다. 싫고 좋음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어른입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는 힘과 자기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될 수 없음을, 힘과 자유는 우리가 용기를 갖고 싸워 얻어야 하는 것임을.
나이를 먹을수록 진정한 어른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는 지금, 지금은 깊은 밤입니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인간이 힘과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걸 긍정합니다. 최소한 저는 그래야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저는 대자유를 얻기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 문이 없는 관문을 뚫으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우리시대에 진정한 어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많은 자극과 격려가 되리라 기대해 봅니다.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우리 정말로 진짜 어른이 되어 살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프롤로그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해결할 길이 없는 딜레마나 역설로 가득한 물음을 話頭(화두)라고 합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상식을 뛰어넘기 위해 화두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삼촌이 비슷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커먼센스인데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살아간다면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할 수 없지요. 바로 이겁니다. 화두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려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 같은 것입니다. 상식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풀 수 없는 역설로 보이지만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쉽게 풀리는 것이 화두이기 때문입니다.
사찰 중심부에는 석가모니, 즉 깨달은 싯다르타 주변에 다양한 부처들이 잇습니다. 싯다르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입니다. 스님들은 싯다르타에게 절하면서 언젠가는 자신만의 삶에 이르기를, 마침내 부처가 되기를 소망하는 겁니다. 선불교에서 고안한 화두는 부처가 되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는데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화두라는 관문을 통과했는지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깨달음에 이른 스승에게 직접 받은 화두를 처절하게 뚫어내는 것이 원칙이지만 선배들의 경험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 되겠지요. 선불교에서는 이런 수행법을 看話禪(간화선)이라 합니다. 화두집의 원형은 1700여개 화두가 등장하는 ‘전등록’을 들 수 있으나 무문스님이 48개의 화두를 선별 해설한 ‘無門關(무문관)’이 있습니다.
‘The Gateless Gate' 문이 없는 관문이라니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띵합니다. 제목부터 최고난도의 화두이며 상식에 반합니다. ‘무문관’이라는 관문은 묘한 곳입니다. 분명 이곳을 뚫고 지나간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문이 없지만 통과했다면 문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요. ‘무문관’이란 화두집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문으로 들어가면 안됩니다. 자기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따를 수는 없지요. 타인이 만들어 놓은 문을 찾으려 두리번거리지 말고 온몸을 던져 뚫어내야 합니다.
저는 ‘무문관’을 ‘나답게’ 읽으려 했습니다. 가급적 무문스님의 해설을 넘겨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48개 관문에 무모하게 몸을 던졌고 1,2년의 세월이 후딱 지난후 48개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에필로그
임제스님은 선종 역사상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누군가에게 심하게 폭행당해 부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지만 스님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실성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구도자들이 바라는 것처럼 스님은 그렇게 바라던 깨달음, 자유를 얻는데 성공한 겁니다. 도대체 열흘 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1,100여 년 전, 임제선사는 대우화상 앞에서 唯識(유식)에 대해 설명한 뒤 이런저런 문제들을 질문했다. 대우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더니 아침이 되자 입을 열었다. ‘그대가 먼 길 온 것을 생각해 하루 묵어가도록 했는데 그대는 부끄러움도 없이 방귀를 뀌어 댔는가?’하며 竹杖子(죽장자)로 때리고 쫒아냈다. 임제가 다시 대우를 찾아가자 ‘부끄러움도 모르더니 다시 찾아왔는가?’ 방망이로 때리고 쫒아냈으나 임제가 말했다. ‘이번에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한 방망이에 부처의 경지를 깨달았습니다. 설사 100겁 동안 뼈를 갈고 몸이 부수어지도록 수미산을 머리에 이고 끝없이 돈다고 해도 이 깊은 은혜를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열흘정도 후 다시 대우를 찾아가니 임제를 보자마자 몽둥이를 들고 때리려 했습니다. 임제는 방망이를 빼앗고 대우를 껴안은 채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대우화상의 잔등에 두어 주먹 쥐어박으니 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초암에 살면서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한 아들을 얻었구나.’
대우스님은 임제가 唯識에 정통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바로 때리지 않고 아침에 때린 것은 알고 있는 불교이론을 실천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 했던 겁니다. 깨달음을 이야기한다는 것과 실제로 깨달은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제 스스로 다른 사람이 만든 이론을 진리로 신봉하며 唯識에 대해 이야기 했으니 竹杖子를 맞을 때에는 임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인에게 노예는 항상 때려도 되는 존재 아닌가요? 방망이로 폭행당했을 때 육체의 고통은 컸지만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대우에게서 竹杖子를 빼앗고 그의 등을 때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겁니다. 늙은 대우스님을 껴안고 등을 가볍게 때린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대우스님이 제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들이 당당히 자기 삶을 주인공처럼 사는 것 이었습니다. 임제가 자신의 등을 때리자 노스님 대우가 그랬던 것처럼 임제 스님도 삶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좋아했던 것이지요.
無門關의 편저자 무문스님은 임제스님의 먼 제자, 400여 년 뒤에 등장한 스님입니다. 당연히 無門關에서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해야 당당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임제의 기상이 서려 있습니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자와 같은 기상입니다. 누가 소나 말, 혹은 낙타에 하듯 사자에 재갈을 물리고 등에 탈 수 있겠습니까? 오직 사자를 죽여야만 우리는 사자의 등에 한 번 타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외적인 권위나 맹목적인 상식을 거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법입니다.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살아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방하지 않는 삶이기에 그건 아마도 창조의 삶일 겁니다.
無門關과 같은 화두 모음집은 주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는 일종의 가이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세련되게 편집된 여행가이드 같은데 여행 가이드를 맹목적으로 믿는다면 낭패를 보기 일쑤입니다. 멋진 풍경에 도달할 때 까지 많은 곤경과 피곤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하던 곳에 도달하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저의 이 책도 여러분을 여행으로 유혹하는 안내책자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