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2) (강신주著, 동녘刊)
움직이는 건 마음뿐!
사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두 스님이 논쟁을 했다. ‘깃발이 움직인다.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서로의 주장이 오갈뿐 논쟁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때 육조 혜능이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두 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 무문관 29칙 非風非幡(비풍비번) -
우리 마음이 가진 특성은 지향성입니다. 영화관에 들어가 어제 만난 사람에게 마음이 쏠린다면 영화는 내게 존재할 수 없을 테죠. 음식을 앞에 두고 딴 생각을 하면 음식은 있는 것이 아닐 테죠.
자의식이라는 질병
대매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마조 스님은 ‘마음에 이르면 부처다’라고 말했다. - 무문관 30칙 卽心卽佛(즉심즉불) -
사물에게는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法無我(법무아)의 경우를 살펴볼까요. 눈사람을 만들고 모자와 장갑을 주었는데 밤사이에 눈사람은 허무하게 녹아버렸습니다. 눈사람이 영원할 줄 알았던 꼬마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법무아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 꼬마가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겁니다. 불변하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人無我(인무아)의 경우를 보도록 하지요. 자신이 늙어가는 모습을 거울로 확인하면 편치 않습니다. 예전에는 그득했지만 텅 빈 통장잔고도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고 믿고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고통과 불만족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외부의 불청객이아니라 우리가 불러내는 유령과도 같습니다.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이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이라는 가르침도 우리마음의 메커니즘을 폭로한 것입니다. 물론 실재와는 무관하게 우리마음이 지어내는 가장 큰 유령은 바로 ‘자아’ 혹은 ‘나’라는 관념으로 나에 대한 집착, 강한 자의식은 우리가 겪지 않아도 될 고통과 불만족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무아를 가르치면서 자의식이라는 불꽃을 가라앉히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해탈이란 자아에 대한 집착, 그러니까 해묵은 자의식을 버려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깃드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불교에서는 고통과 불만족을 낳는 자의식 이면에 그것을 개달은 자의 마음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경전에서 마음으로
법연스님이 말했다. ‘석가도 미륵도 오히려 그의 노예일 뿐이다. 자 말해보라! 그는 누구인가!’ - 무문관 45칙 他是阿誰(타시아수) -
문자는 계급과 권력이 발생하는 기원으로 문자를 독해할 수 있는 권력층과 문자를 접하기 어려웠던 민중으로 나뉩니다. 이로 인해 문자와 이론을 강조한 교종은 귀족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부처-경전-경전 독해자라는 위계질서가 잡힙니다. 이러한 질서로 인해 불교를 믿어도 일반대중은 성불하기 어렵다는 풍토가 만들어 집니다.
‘불립문자’ 선종은 절망에 빠진 민중계층을 위해 슬로건을 만듭니다. 일자무식이어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며 심지어 문자에 대한 집착이 성불의 가장 큰 장애라고 기염을 토합니다. 어려운 경전을 공부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응시해서 자신이 갖추고 있는 불성을 자각한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문자’에서 ‘마음’으로 패러다임이 이동한 것이죠.
깨달았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석가모니나 미륵, 혹은 그들이 남긴 글에 의존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석가와 미륵마저도 노예로 거느리고 있는 ‘그’는 누구입니까? 법연 스님의 질문에 ‘나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지요. 지금 법연스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나 미륵의 노예가 될 것인가, 그들의 주인이 될 것인가?’ 석가모니나 미륵의 주인이 되는 순간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부처가 되는 찬란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不涉階梯(불섭계제) 懸崖撒手(현애철수)
계단이나 사다리를 밟지 않아야 하고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
계단이나 사다리를 의존해 절벽에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설 수가 없을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계단이나 사다리가 우리의 당당한 삶을 막고 있었던 셈입니다.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 그건 우리가 그것에 좌지우지된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어도 그것이 외적인 것이라면, 어느 순간 반드시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싯다르타도 그렇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계단이나 사다리로 상징되는 일체의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온몸으로 깨닫지 않는다면 그건 깨달음일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스스로 주인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자로의 목숨을 건 비약
석상화상이 말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는가!’ -무문관 46칙 竿頭進步(간두진보)
미끄러운 대나무에 오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만 더 힘든 것은 한 발도 지탱하기 어려운 그 꼭대기가 마치 평지인 것처럼 서 있는 겁니다. 자기 혼자만 서 있을 수 있기에 대나무 꼭대기는 자신의 본래면목을 상징하며 확고히 서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을 확고하게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발을 떼는 순간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것이며 자신의 본래면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올라온 시간과 노력이 아깝기 그지없는데 어떻게 쉽게 발을 뗄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 대해 주관적이고 타인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객관적입니다. 자신을 주체로, 타인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한다는 겁니다. 타인을 물건처럼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요. 당연히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주체이고 주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