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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 경계에 흐르다(1) (최진석著, 소나무刊)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읽고 최 교수의 팬

by 물가에 앉는 마음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읽고 최 교수의 팬이 되었으며, 지인들에게 책을 선물 할 때 ‘~무늬’를 선물한다. 그의 명성과 실력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만약 그가 중앙무대에서 명성을 얻지 못했다면 나는 사람들의 식견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무림 고수의 수필집이다.


不言의 가르침

사레지오 중학교 3년 내내 누구로부터 성당에 다니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선생님이나 신부님들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시고 우리의 자율적 결정을 믿고 기다리셨다. 종교를 선택하는 일도 우리가 스스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인정해 주셨다. 이런 인정 속에서 우리는 매우 강력한 종교적 감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강제적인 교화보다도 감화되기까지 기다려 주는 일이 훨씬 효과가 크고 강력하다는 것을 이미 어린 그 나이에 알았다.

교육의 핵심이 무엇일까?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우며 살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위대하고 창의적인 모든 결과가 출현한다고 믿는다. 밖에 있는 별을 찾아 밤잠을 자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줘야 한다.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 혹은 자기에게만 있는 자기만의 별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어떻게 알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까? 이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직접 느끼고 직접 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나는 중학교 때의 추억에서 그 힌트를 얻는다.


만원 버스에 시달리다 내린 학생들이 교문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외국인 신부님이 학생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셨다. 학생 이름을 다 외우는 것도 굉장한 일이지만 하나하나 불러 줄 생각을 하고 또 실천하시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경이적이다. 지금은 신부님 성함이나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흐릿한 영상이 남긴 감동만큼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 신부님으로부터 한 번도 내가 별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또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는 말씀도 하신 적이 없다. 이 세계에서는 바로 내 자신이 주인이라는 말씀도 하신 적이 없다. 이 세계에서는 바로 네 자신이 주인이라는 말씀도 하신 적이 없다. 일반명사로 살지 말고 고유명사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하신 적이 없다. 너에게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휘해야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설명도 하신 적이 없다. 대답보다는 질문을 잘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신 적이 없다. 독립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지시키지도 않으셨다. 그저 아침 일찍 학교 정문에 서서 학생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셨을 뿐이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 주실 때마다, 호명되는 학생은 그 순간에 고유한 자신의 이름 앞에서 이 세계에 유일한 존재로 등장하는 경험을 한다.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일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 가야 할 길일 것인데, 그 일은 커다란 목소리나 화려한 이론이 아니라 단순하다면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이름 불러 주기’로 완수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는 내가 우리 속에서 용해되지 않고 고유한 나로 존재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신부님이신지 아닌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 신부님은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거나 하는 말씀을 잘 안 하셨던 것으로 기억난다. 어떤 학생이 교정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거나 주우라고 채근하지 않으셨다. 그저 한마디만 하셨다. ‘너 지금 쓰레기를 버렸어.’

힘센 학생이 누군가를 때리면 때린 학생을 불러다 교훈적인 가르침을 주지 않으시고 그저 한마디 하실 뿐이다. ‘너 지금 너하고 똑같은 다른 사람을 때렸어.’ 그저 발생한 일이나 행한 행위를 사실적으로 알려 주실뿐이었다.

이러면 자기 행위를 교정한 공이 신부님 것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의 차지가 된다. 쓰레기를 주우라 해서 줍는다면 모범적인 태도로 회복한 공이 신부님 차지가 되나 쓰레기를 줍고 안 줍고는 전적으로 학생이 결정해서 하는 행위가 되니 오롯이 학생 차지가 되는 것이다. 학생이 스스로 자기 행위의 결정자로 등장한다. 여기서 공이 누구 차지가 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자기가 자기로 성장하는 데에 필요한 일은 자기 행위의 주인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있다고 느끼는 일이다. 별을 찾는 과정 혹은 자신에게 있는 별을 실현하는 과정은 바로 자기가 행위의 주인이 되는 훈련을 하는 일인데, 이런 훈련 기회를 바로 신부님이 주셨다.

‘不言의 가르침’은 개념적으로 규정하거나 내용을 정해 주는 가르침을 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쓰레기를 주우라거나 때리지 말라는 지시적 가르침이 아니라 사실만을 알려준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피교육자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 등장한다. 책임성을 가진 독립적 주체로 등장해 별을 찾아 평생을 헤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을 아는 힘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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