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산다는 것
사람으로 산다는 것
성공한 사람에게 큰 적은 성공‘기억’이다. 성공할 때는 ‘사람’으로 존재하다가, 성공한 다음에는 그 ‘기억’에 갇혀버리기 십상이다. ‘기억’에 갇힌 그 ‘사람’은 새롭게 펼쳐지는 상황에 맞는 새로운 방법을 찾지 못하여 거듭 성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기억’에 주도권을 뺏긴 그 사람은 온전한 그 ‘사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혁명가에게는 ‘혁명’의 ‘기억’이 가장 큰 적이다. 혁명할 때는 ‘사람’으로 존재했는데 혁명한 다음에는 그 ‘기억’에 갇혀버리기 십상이다. ‘기억’에 갇힌 그 ‘사람’은 무정하게 전진하는 역사의 흐름에 맞는 새롭고도 적절한 시대의식을 포착하지 못한 채, 혁명을 하던 그 시점에 멈춰 서서 혁명 깃발을 ‘완장’으로 쓰다가 결국 ‘반항아’로 전락해 버린다.
‘사람’이 ‘기억’에 갇혀 더 이상 창의적 돌파가 불가능해지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되 진짜 ‘사람’ 혹은 ‘참된 사람’이 아니다.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기억’에 있기 때문이다.
잔소리에 대하여
가장 훌륭한 통치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만 아는 것이다. 그다음 단계는 통치자를 친밀하게 느끼며 찬미한다. 그 아래는 통치자를 두려워하는 것이며 가장 낮은 단계는 통치자를 비웃는 것이다. (도덕경 17장) 정치가 낮은 단계로 퇴화하는 것은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지 않기에 백성들도 통치자를 믿지 않는 것이다. 최고단계인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 아는 것은 통치자가 일하지 않기 때문인데 팔짱 끼고 노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과중하게 느낄 통치행위를 안 한다는 뜻이다. 특정 이념이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은 대개 선의에서 비롯된다. 자식을 잘되게 하려고 부모가 선의로 요구하는 일들이 자식의 성향과 맞지 않으면 불신이 생기고 자식은 부모를 폭력적으로 생각한다. 이 불신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서 비롯된다. 믿지 못하니 잔소리가 이어지는데 잔소리는 자식이, 백성이 지켜야 할 이념이나 기준이다. 잔소리를 줄이는 일은 자식이나 백성들이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삶을 이뤄나가는 주도권을 자식에게 돌려줘야 한다. 자식에게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귀착되도록 해야 한다. 백성들에게는 自律, 自正, 그리고 自定의 능력과 자부심을 돌려주는 정치를 해야 한다.
외우기의 힘
어느 기자가 나에게 ‘창조인문학 전도사’라는 간판을 달아줬는데 나는 외우기를 강조한다. 창조와 창의와 외우기는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하지만 외워서 肉化(육화, 체화) 되면 서서히 내 것이 된다. 10~20년 전 ‘창의’, ‘창조’, ‘선도’ 등의 구호가 걸리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왜 아직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가. 혹시 접근이 잘못되고 있어서가 아닐까?
창의력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다. 창의력은 발휘할 수 있는 기능적인 활동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연결된 인격의 힘이다. 사회적으로 창의성이 발휘되고 있지 않다면 그건 분명히 창의력이 튀어나올 정도의 인격적인 준비가 된 사람들이 드물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창의적이지 못하다면, 창의적인 두께의 인격을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이다.
창의성이 필요하다면, 창의성을 발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기르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인격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단련된 내면을 갖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놀이나 공상에 빠지거나 운동, 글쓰기 같은 것들이 창의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외우기도 이런 것들과 함께 큰 몫을 한다. 창의성은 축적되고 단련된 내면의 폭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창의력은 지식을 축적해서 길러지지 않으나 완전히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축적된 지식의 양은 창의성의 수준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지식이 내면을 단련하는 일에 사용되었느냐, 아니면 축적의 관리자로 남았느냐의 차이다. ‘나’를 놓치지 않고 지식의 인격화를 이뤄야 한다. 외우기는 나를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틀을 깨고 나올 힘을 갖도록 단련시킨다.
지식보다 지루함을
스무 살에 사법고시에 합격 후 승승장구한 젊은이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요직에, 미국 유명대학교수인 경제학박사도 대통령 보좌관이다. 세상의 많은 부모가 자식에게 저런 사람이 되어보라고 말할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느 아낙이 대통령을 조정하여 국사를 주무르는데도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고 기업을 돌아다니며 거금을 갈취했다. 어디에서도 영재의 품격이나 고고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자존감, 자부심, 사명감, 자긍심 같은 것을 찾아볼 수도 없게 허물어진 대한민국 최고 영재의 모습이었다.
우리의 영재들은 왜 고작 이 모양인가? 그들은 그렇게 길러졌다. 시험만 닥치면 모든 일이 면제되고 성적만 좋으면 된다. ‘사람’으로 교육되지 못하고 기능적인 ‘시험 기계’로만 길러졌다. 고등학생들에게는 대학만 합격하면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젊은이들에게 예의를 가르치지 않았고 삶의 가치를 가르치지 않았다. 왜 사람은 공동체와 함께해야 하는지도 가르치지 않았고 친절이나 착함이 어떻게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지도 가르치지 않았다. ‘사람’이라기보다 ‘기계’에 가깝게 길러졌기에 삶의 품격이나 자아의 완성이니 하는 말들은 말 꺼내기도 낯부끄럽다.
사람이라면 ‘덕’을 갖고 있어야 하며, 덕은 지식보다도 심부름, 노동, 여행, 방황, 지루함이나 실패, 독서 등으로 길러진다. 기계는 행복도 모르고 희생, 헌신도 모른다. 자존감도 없고 자부심도 없다. 품격, 기품에 가치를 둘 줄 모른다. 기능적 교육의 징벌적 보복이 진행되고 있다. 우선 각자 자기 자신과 어떻게 살고 있는지부터 돌아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