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2) (김정운著, 21세기북스刊)
머리 복잡한 업무들이 많아 한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 세상에 복잡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 월급 받는 일이 있겠냐만은 전공과 동떨어진 ‘소송’관련 업무들이 현안으로 떠오르니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 같다. 막걸리 한잔 먹는 자리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소송과 민원들이 민 형사, 공정거래위원회, 인권위원회, 국민신문고, 국회의원 민원 등 간통사건 빼고는 모든 케이스가 있다. 내 자리는 법학을 전동한 사람이 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농담 삼아 할 정도이다.
복잡한 소송을 처리하면서도 그간 읽었던 책들에서 위안을 찾았다. 우리 회사가 억울한 상황인데도 소송을 진행하려니 더욱 울화가 치밀었는데 상대방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된 것도 책에서 배운 것이다. 오늘은 김정운교수의 두 번째 책이야기이다.
언젠가부터 ‘창조경제’, ‘창조경영’이란 용어가 일상화 되었다. 이전과는 뭔가 다른 혁신적인 것을 만들어내자는 의미이나 엄밀히 말하면 틀린 단어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을 창조라고 하는데 인간은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신의 흉내만 낼 따름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모방행위에 필요한 ‘거울 뉴런(mirror neuron)’을 갖고 태어난다. 모방이 생존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도 ‘창조’라는 단어는 신의 영역에 해당되었고 인간 행위와는 관련 없는 단어 였다. 폴란드 학자 샤르비에브스키는 ‘시’에만 창조개념을 국한 했다. 미술이나 조각은 모방이나 시만 시인의 상상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21세기의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창조 강박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산업, 스포츠 심지어는 섹슈얼리티에 이르기까지 전 방위적으로 확대 된다. 그러나 창조의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을 잘 분석해 보면 미학적 차원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롭다’, ‘창조적이다.’라는 표현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엇’ 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를 가리켜 독일 사회학자 레크비츠는 창조경제의 핵심은 ‘미학적 자본주의’에 있다고 주장한다. 미학이 빠진 창조는 막힌 것이다. 창조경제는 곧 미학이지만 한국의 창조경제 논의에서는 실종되어 있다. 우중충한 아저씨들이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에 살면서 같은 양복을 입고 똑같이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출근하여 같은 헤어스타일로 창조를 논하는 한 창조경제는 어림없는 소리다.
예전과 달리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고 인터넷으로 외국대학 소장 자료를 검토할 수 있으므로 정보와 정보를 엮어 어떠한 지식을 편집해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인 세상이다. 편집의 시대에는 천재나 지식인의 개념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아는 사람이 지식인이고 많은 정보를 외우고 있는 사람이 천재였다. 그러나 검색하면 모든 정보가 나오는 현재는 정보를 ‘잘 엮어내는 사람’이 지식인이고,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남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엮어내는 사람’이 천재다. 현재의 지식시스템은 네트워크식이나 전통적 지식시스템은 계층적이었다. 학사의 지식은 석사만 못하고 석사는 박사만 못하다. 학위에 따른 강사료도 법적으로 다르게 책정되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면 지식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게 되며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논문이 실리게 되면 팔자도 고치게 된다.
황우석박사가 국가적으로 보호해야할 지적재산이라며 영웅시되어 국정원 직원들이 근접경호를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허위 논문’ 을 밝혀낸 사람들은 세계적인 석학이 아닌 취미로 모이는 인터넷 동호회였다. 황우석 논문의 핵심은 최고의 생명과학 기술이 아니라 허접한 포토샵기술 이라고 밝히자 한국사회의 충격은 엄청났다. 진실공방과 국가적 자존심의 훼손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지식권력은 더 이상 학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식권력인 대학의 붕괴는 이미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는데 황우석 사건을 통해 폭발한 것이다.
지식권력의 대학 독점 붕괴의 또 다른 징후는 ‘미네르바 사건’이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로 한국에도 경제위기가 닥칠 것이란 경고의 글이 인터넷에 떠돌았는데 교수나 경제전문가들은 이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전문가들의 분석보다 미네르바의 예언을 믿기 시작했고 환율변동과 주가지수 변화에 대해 미네르바가 내 놓은 100여 편의 글들이 현실화 될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남의 칭찬에 인색한 교수들까지 미네르바야 말로 최고의 경제전문가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회적 반향이 심상치 않자 기재부장관까지 나서서 반론을 제기하고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던 국가는 ‘허위사실 유포’ 아주 황당한 죄목으로 미네르바를 체포한다. 범인을 잡고 보니 상황이 더욱 황당해 졌다. 대단한 경제전문가도 아니었고 교수도 아니었고 ‘전문대 출신의 무직자’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전문대 출신의 무직자가 ‘훌륭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정작 미네르바는 인터넷의 잡다한 지식을 짜깁기 했을 뿐이라 설명했지만 그것은 단순한 짜깁기가 아니었다. 실제 경제 현실에 적용되어 검증된 아주 정당한 ‘지식편집’이었다. 대학에서 인정하는 논문과 학위시스템에서만 가능했던 지식편집이 이제는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에 기존의 지식권력자들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지식편집의 권력이 바뀌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나 대학의 지식권력이 아직까지 유지되는 것은 순전히 학위 때문이다. 그러나 이 쓰라린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폼 나는 가운의 석. 박사 학위를 주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대학의 지식편집 권력은 이미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