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인생 절반을 그리는데 사용하는 것 같다.
동생의 그림 솜씨는 어렸을 때부터 특출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종이에 빈 여백이 있으면 만화를 그렸는데 어쩌면 글을 배우는 것보다 그림을 먼저 그렸던 것 같다.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교내, 외 사생대회가 개최되면 상을 받아왔다. 고등학생시절,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대에 들어갔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국전과 구상전에서도 이름 날리는 촉망받는 화가였으나 꿈을 접고 말았다. 배 곯는 시대의 예술가이자 언론인이셨던 선친의 반대도 있었지만 결혼도 앞두고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호당 몇 백만 원을 받는 작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현실의 벽을 실감했을 것이다.
대학졸업 할 때까지의 학비만 대주고 이후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집안 전통에 따라 자력으로 대학원을 다니고 장가가야 했기에 이후, 동생은 화가의 꿈을 접고 방송국에 입사하여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높였다. KBS에 입사한 후 경직된 공기업 분위기가 싫다며 SBS로 옮겨 일지매 등 여러 프로그램 미술감독을 했으니 좋아하는 미술을 하며 월급 받는 행복한 직장인이 되었다.
약 10년 전 ‘사오정과 별세계’라는 제목의 글을 썼었다. 소음성 난청을 예방하기 위한 글이었는데 작은아이 이야기가 나온다.
소음성 난청으로 인한 청각장애와 말 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속칭 사오정 증세는 예방방법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별명이 사오정인 저희 집 작은놈같이 別世界(별세계)를 별 세계(Three Star)로 알아들으시는 분들께는 예방대책으로 귀마개보다는 마음의 양식을 넓힐 수 있는 책을 권해 드립니다. 즐겨보는 TV채널인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보다가 신기한 것이 나오면 ‘거참 신기하다, 別世界같네’ 하고 혼잣말을 하면 ‘아빠, 별이 없는데 왜 Three Star라고 그래...’ 애야 오늘은 공부하지 말고 책을 보렴...
작은아이 별명이 ‘사오정’이라고 공개된 이후 작은아이에게 한동안 뜯겼는데 이후 작은아이는 대학입학 후, 某기업체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에 합격하여 미국연수도 다녀오고 3학년 때는 교환학생으로 네덜란드에 가서 공부를 했으니 완전한 ‘사오정’은 아닌듯하다.
한국 전쟁 때 피난 내려오신 선친은 북에서부터 詩를 쓰셨지만 남으로 내려와서는 미군부대에서 잠깐 동안 그림도 그리셨단다. 그림 그리는 소질이 피를 타고 흘렀는지 동생에 이어 작은아이도 그리는 것에 열중하고 있다. 다만 캔버스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것만 다르다. 잠에서 깬 후 샤워하고 화장하고 코디 등 외출준비를 마치는데 까지 보통 두 시간이 소요되는데 휴일에 거실에 앉아 작은아이 준비과정을 보면 기가 질릴 지경이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등학생시절 작은아이 선생님께서는 큰아이도 가르치신 분이다. ‘너희 언니는 공부하느라 시간이 아까워 머리도 감지 않고 등교를 했는데(우등생이었던 언니는 머리는 감고 다녔다며 아직도 선생님 말을 부정한다.) 너는 수험생인데 매일 화장을 하고 오냐?’ 고등학생 때는 색조화장을 하지 않아 시간이 적게 걸렸지만 대학생인 요즈음에는 색조화장을 하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가부끼에 등장하는 일본배우들 수준은 아니나 막내 그림실력은 언니와 엄마실력을 뛰어넘는 프로급 실력인 것은 확실하다.
막내보고 농을 던진다. ‘너는 인생 절반을 그리는데 사용하는 것 같다. 그리는데 2시간, 외출 후 집에 와서 화장 지우는데 1시간이니 하루에 3시간을 그리는 일에 투자한다. 경영대가 아닌 미대가 적성에 맞을 텐데 학과 선택이 잘못된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해외 패션TV를 즐겨본 막내는 얼굴그리기와 패션코디에 관해서는 일정수준에 올라 있다. 직장인인 언니와 애 엄마도 외출 전에는 막내 자문을 구한다.
용산에 있는 S여대에 입학하자마자 학교생활이 재미없다며 자퇴하려할 때 애 엄마가 막내를 설득한 사유도 옷 입기, 그리기와 관련되어 있었다. 자퇴하겠다는 막내를 앉혀놓고 설득하는 논리가 패션과 그림그리기였다. ‘네가 좋아하는 이태원과 명동이 가까이 있는데 왜 학교를 그만두려하니? 다른 학교에서는 이태원과 명동에 가는 것이 불편하니 그냥 다녀라. 누가 너보고 공부만 하라고 했냐? 1년은 다녀보고 결정해라.’ 자퇴하려 했던 막내는 낙제를 선택해서 반수를 했다.
막내가 교환학생으로 네덜란드에 가서 귀국할 즈음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네덜란드식 그리기를 배워와 귀국하는 날 공항에서 막내딸을 찾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이다. 이산가족 상봉하듯 피켓이라도 들고 나가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