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처럼 살지 않는 방법. 이지, 焚書(분서), 개처럼 살기
개처럼 살지 않는 방법. 이지, 焚書(분서)
무릇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처음에는 見聞이 귀와 눈으로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자라나서는 도리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서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기를 지속하다보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나날이 넓어진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 焚書, 童心說 -
李贄(이지, 1527-1602)는 유학자였지만 단순한 유학자이기를 거부했던 사상가이다. 유학자란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핵심은 아마도 克己復禮(극기복례: 자신을 극복해서 예절을 회복하자.)일 것이다. 결국 예절을 존중하고 배워야 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자신의 제자들이 예절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끔 엄격하게 가르쳤다.
먼저 아이들은 어른들의 예절을 보고 들으면서 그것을 흉내 낸다. 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 즉 동심이 소멸되는 첫 단계인 셈이다. 어른들의 제스처를 반복적으로 흉내 내다 보면 그것은 어느새 도리의 형식으로 내면화 될 것이다. 이 순간 동심은 완전히 사라진다. 아이때 물에 빠진 여인을 구하지 않는 남자가 될 수도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로서는 여인의 손은 잡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의범절을 강조하던 유학자들의 눈에는 이지가 이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내내 이지와 그의 글이 ‘斯文亂賊(사문난적: 유교를 어지럽히는 적)’이라고 지탄받았던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조선시대만큼 格物致知(격물치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르다.) 라는 경험공부와 함양이라는 도리 공부가 중시되었던 때도 없었다. 사실 이지는 동료나 후배 유학자들로부터 욕을 먹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책에 ‘焚書’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태워버릴 책’, ‘태워지게 될 책’ 이라는 의미다. 이단으로 치부되는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이지가 동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글이 우리의 궁금증을 다소 해소해줄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 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 續焚書, 聖敎小引 -
50세 이전에 한 마리의 개처럼 살았다는 이지의 투철한 자기반성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50세 정도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살았던 삶이나 그로부터 얻은 학식이나 평판 등을 정당화 하는데 나머지 생을 할애하는 법이다. 그렇지만 이지는 비범했다. 물론 이것은 그가 50세 까지도 인문학적으로 투명한 정신, 즉 동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한 마리의 개처럼 살았다고 솔직하게 토로하는 순간 그는 드디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지 그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다른 사람이 임금님이 발가벗지 않았다고 해도 그 만은 발가벗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은 다른 개가 짖더라도 그는 이유가 없다면 짖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솔직함과 당당함이 바로 동심이 가진 힘일 것이다.
이지의 글을 읽다보면 니체를 떠올리게 된다. 니체는 우리 정신은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했다. 첫 번째는 ‘낙타’로 비유되는 정신으로 등에 짐을 올리면 아무 저항 없이 짐을 나른다. 두 번째는 ‘사자’로 비유되는 정신이다. 사자의 의지를 무시하고는 아무 짐도 올릴 수 없다. 짐을 올리려면 사자를 죽여야 하므로 사자의 정신은 일체의 억압을 부정하는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세 번째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아이’의 정신이다. 니체의 아이는 솔직함과 당당함을 상징하므로 과거를 맹목적으로 답습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동양의 이지와 서양의 니체가 모두 동심, 즉 아이의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솔직함과 당당함!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는 솔직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해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는 자유인의 당당함! 어쩌면 우리는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언제까지 우리는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것인가? 50세에 드디어 자신으로 살 수 있게 된 이지는 우리에게 묻는다.
소제목이 ‘개처럼 살지 않는 방법’인데, 개인적으로는 ‘개처럼 사는 것’만 해도 나쁘지 않은 삶이라 생각 한다. 키우고 있는 검은색 푸들은 ‘솔직함과 당당함’은 아닐지라도 의사 표현이 직관적이다.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의사표현에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그날 기분에 따라 장난감 바구니에서 공을 골라오며 다른 공을 던지면 따라가지 않는다. 놀이가 끝나 쉴 때에는 옆에 누워 몸을 긁어달라고 칭얼댄다. 과도한 장난에는 이빨을 드러내니 지식을 기반한 ‘솔직함과 당당함’은 아니지만 감정을 드러내는데 매우 솔직하고 직관적이다.
계산 빠른 사람들은 특정 현상에 대응하기 전 본인의 이해득실에 대한 계산을 하며, 언행에 대한 파장을 생각한다. 지위 높은 사람 앞에서는 특히 그렇다. 높은 사람이 청색을 붉다고 이야기 하면 심지어는 ‘처연하게 붉다’ 라고까지 한다. 우리 집 강아지처럼만 살아도 ‘노! 파란색을 왜 붉다고 그래! 멍청하기는...’라고 했을 텐데.
우리 집 강아지처럼 살았던 시절 이야기다. 고위 간부 회의석상에서, 협력직원들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 대한 고등법원 패소판결 후 대법원 판결전망에 대해 CEO가 내게 물었다.(애초에 번지수가 틀렸다. 법무담당처장에게 물었어야 하나 사업담당처장인 내게 물었다.)
‘집니다. 유사판례 분석결과 국내 굴지 기업인 H, K그룹이 패소했습니다. 우리가 협력업체를 관리하고 있는 방법도 H, K그룹과 다르지 않습니다.’
짧지만 확신에 가까운 내 이야기에 CEO도 짧게 한마디 했다.
‘어떻게 담당처장이 진행 중인 재판에서 진다고 이야기 하나? 이길 생각을 해야지.’
공개회의 석상이니 상당한 수준의 질책이었다.
찬물이 뿌려지자 법무, 인사담당처장 등 관련처장 및 유사 문제점을 안고 있는 사업처장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입을 닫고 있었던 다른 처장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소수 의견을 듣기는커녕 지식도 없이 지위를 이용해 윽박질러 다수의 입을 봉해버리는 놀라운 재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변호사를 포함한 사내 실무진은 허수아비나 바보가 아니다. 판례, 운영 실태에 관한 자료 분석과 공부한 결론이 내 입을 통해 ‘재판에 집니다.’로 표현된 것인데 강아지 입이 아닌 전문가 입까지 봉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회사는 대법원 패소후 대응방법, 즉 B-Plan을 준비했어야 하나 그러지 못했다. 결국 대법원 패소 후 채용절차가 늦어져 CEO는 국회의원 소환, 노동부 조사 등으로 체면이 깎였다. CEO가 고초(?)를 겪은 것에 대해 괘씸죄에 걸린 나는 특별감사를 받았지만 무혐의 처분되었다. 특별감사를 받기 전 감사실장에게 이야기했다. ‘특별감사 한다고 칼을 높게 빼들지 마라. 나에게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이 판명되면 칼을 높게 빼어든 손이 어색해 보이게 된다. 다만 죄가 있다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