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1) (강신주著, 사계절刊)
간혹 본문보다 프롤로그가 더 마음에 와 닿는 경우도 있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패르소나(진정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투사된 모습)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솔직함과 정직함이 모든 인문정신의 핵심에 놓여있다.
인문학의 힘과 정신을 작가의 시선으로,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정의했다고 생각된다. ‘철학, 인문학을 하면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라는 부모님 세대의 질문과 타박에 대해 진부하다하고 투박하다 한다. 관계없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무식하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식한척 하는 본인에게 물어봐라. ‘철학을 왜 공부하는데? 인문학은 어디다 쓰는 물건이야?’ 10년간 공부했는데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나는 강신주씨의 프롤로그를 보고 또 배운다.
프롤로그, 고통을 치유하는 인문정신
1. 방송국에서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스튜디오에서 아쉽게 헤어지며 따로 만나기로 했다. 약속장소에 일찌감치 도착한 나는 시인을 기다렸다. 약속시간인 1시가 지나자 2시로 착각했나 하여 기다렸으나 시인은 오지 않았다. 기다림을 비웃기라도 하듯 3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아 마침내 시인에게 전화했다.
‘저 강신주인데요. 저랑 1시에 만나기로 하지 않았나요?’
그러자 시인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런데 오늘은 별로 시내에 나가고 싶지 않네요. 다음에 보도록 하지요.’
너무 당혹스럽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를 하찮게 보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커피를 한 잔 더 시켰다. 쓰디쓴 커피를 마시다 문득 조그만 깨달음이 내게 찾아왔다. 그건 바로 솔직함과 정직함에 관한 것이다. 방송국에서 나와 만났을 때 시인은 분명 감정으로 솔직했고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단지 다른 이유로 나와 만날 마음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약속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시인이 나왔다면, 그는 우울함을 억누르고 유쾌한 척 대화에 임했을 것이다.
바람맞던 날 나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시인이 나를 편안하고 유쾌하게 만날 수 있을 때 나오기를 원한다. 약속 때문에 억지로 나와서 내 앞에 앉아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건 껍데기와 앉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날의 만남은 아주 행복했다. 시인은 정말 나하고 만나고 싶을 때 나왔기 때문이다.
2. 솔직함과 정직함은 내가 만난 시인을 포함한 모든 인문정신의 핵심에 놓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수영(1921-1968)시인은 위대했던 것이다. 자신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솔직함으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회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일부를 보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삼십 원을 받으려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민주투사인 척했을 때, 김수영은 자신의 소시민적 미약함에 정직하게 직면했고, 그것을 숨기지 않고 노래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위대하다. 그것은 자신을 치장하던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패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거짓된 인문학은 여러분에게 더 두렵고 화려한 페르소나를 약속할 것이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나가르주나, 이지, 마르크스, 들뢰즈 등등 솔직한 인문정신이 우리에게 가하는 고통을 견딜 수 있겠는가? 아니 우리는 견뎌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에게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작은 희망이라도 생길 수 있을 테니까.
3. 거짓된 인문정신과 참다운 인문정신! 자기 위로와 자기 최면의 방법을 알려주는 인문학과 솔직함에 이르도록 만드는 인문학! 주폭남편이 오늘도 아내를 때렸다. 거짓된 인문정신은 아내에게 좋은 생각을 하라고 이야기한다. ‘어제는 두 대 때렸는데 오늘은 한 대 때렸으니 운이 좋아. 아직도 남편이 나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야.’반면 참다운 인문정신은 ‘나를 사랑한다며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의 삶이 있는 만큼 나의 삶을 돌아볼 권리와 의무가 있다.’ 참다운 인문정신이 더 심한 폭력을 유발할 수도 있고 반성을 유도할 수도 있지만 정직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순간 아내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부부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참다운 인문정신, 그리고 솔직한 목소리를 모으려 노력했다. 그 속에는 여러분들의 상처를 후벼 파는 목소리가 있을 수도 있고 감당할 수 없어 눈을 돌려야 했던 살풍경을 다시 응시하도록 만드는 목소리도 있다. 어느 것 하나도 여러분의 삶을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직한 인문정신이 건네는 불편한 목소리를 견디어낼수록 우리는 자신의 삶에 더 직면할 수 있고, 나아가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꿈도 키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