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 인문학명강(1)

인문학명강(1) (강신주등 15명共著, 21세기북스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15명이 만든 책이지만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박웅현씨의 이름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들에서 깨달음을 찾다. 박웅현

꽃 색깔이 일곱 번 변한다는 “란타나”라는 작은 꽃이 있습니다. 노란색으로 피어올랐다가 진한 빨간색으로 변하는데 꽃이 작아 눈길을 끌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이틀 동안 꽃을 들여다보니 아침에는 진주 같은 이슬이 맺혀 있었는데 점심때 보니 노란 꽃이 올라 왔고 다음날 점심때 보니 꽃이 확 피어났습니다. 저는 최근 이런 기적들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늦여름의 하루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낮에는 36도의 열기를 내뿜지만 이른 아침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고 저녁때는 바람이 차가워진 것을 느낍니다. 태양 속에 가을이 숨겨져 기적처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들을 잡아냈을 때의 짜릿함, 그게 요즘 제가 사는 가장 행복한 포인트입니다.


정도전이 쓴 문장 ‘창문을 열고 편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가지 끝의 흰 것 하나 하늘의 뜻이 보이노라.’를 읽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역을 읽는 이유는 하늘의 뜻이 알고 싶어서 였는데 창밖으로 시선을 툭 던지니 어느새 흰 꽃이 올라와 거기서 하늘의 뜻을 깨닫는 겁니다. 많은 선승들이 면벽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이치를 따지면 더 많은 깨우침을 얻을 텐데 면벽을 하면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법정은 입적하기 전, 책 몇 권을 들고 암자에 들어가 실존철학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힘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습니다. 법정은 ‘지식은 바깥의 것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지혜는 안의 것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핵심이며 저는 이것이 동양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은 어떤 것을 알기 위해 따지고 알아보고 분석하여 답을 찾아냅니다. 그러한 장점이 화성까지 가게 만들었습니다. 화성에 간 우주선의 이름이 ‘호기심: 큐리어시티(Curiosity)’인데 인간의 호기심으로 화성까지 가게된 것입니다. 반면 동양은 분석적인 삶의 태도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봄꽃에서 하늘의 뜻을 보는 이 능력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철수의 ‘가을사과’ 라는 판화에는 동양의 힘인 ‘통찰하는 힘’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그려 놓고 그림 위의 텍스트를 인상적으로 적었습니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이철수는 논문 30페이지, 50페이지로 얘기할 수 있는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단 세 줄로 끝냈습니다. 만유인력 때문이라는 서양의 시선으로 정도전이 봤던 그 흰 꽃을 보았다면 꽃을 분해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이 꽃은 무슨 꽃이야? 녹색 사이에서 올라오는데 그 색소는 어디에 있는 거야?’ 논쟁은 rhetoric, 즉 수사학을 만들어 내고 이를 이용해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반면 사색은 시를 만들어냅니다. 시에는 이상적인, 논리적인, 과학적인 분석은 없습니다.


유흥준교수의 ‘정직한 관객’이란 책을 보면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선임연구원이자 큐레이터가 열흘정도 우리나라를 돌아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열흘 동안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동양의 이 작은 나라에서 너희가 갖고 있는 너희만의 색깔을 보고 자극을 받고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 한 가지는 그것이 왜 현실에 반영되어 있지 않느냐. 이게 열흘간의 화두였다. 이제 조금 알겠다. 당신들은 세계화가 되기 위해서 뉴욕을 보고 있는 것 같더라. 세계화가 되고 싶으면 강진, 해남의 흙 색깔을 봐라.’


저는 ‘모든 것이 존경의 대상이다.’라는 말을 생의 근거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바람하나도 예민하게 잡으려고 노력하고 떨어지는 빗줄기 하나도 전부 다 정의를 가지고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길가에 피어오르는 꽃들, 스쳐지나가는 동물을 보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양 무심하게 지나칩니다. 그러나 동물이 아무것도 아니면 나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 것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것에 대한 존경을 표했으면 합니다. 우리 주변에 정의를 가지고 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얼마만큼 들여다보느냐가 오늘날 동양고전이 갖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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