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와 마음도, Code도 맞지 않고 서로 불편하다.
이전 편지인 ‘위징과 황태후’와 약간 관련성이 있다. 입에 발린 소리를 못하고 바른 소리를 잘한다. CEO 마음에 들지 않아도 천성이라 고치질 못한다. Code도 맞지 않고 서로 불편하다.
사실 본사 처장들은 사업소 처장들보다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예하 사업장을 관장해야 하니 많게는 직원 2000명, 매출 4500억 원 규모의 사업을 운영해야 하니 중견기업 CEO 규모를 능가한다. 본사 처장을 하다가 지난 12월 인사이동으로 GT정비기술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매출 200억, 직원도 100명이니 권한으로만 보면 이번 인사에서 나는 좌천된 것이 분명하다.
보직을 놓으려면 1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정들었던 본사 식구들과 익숙함을 뒤로하고 생소한 업무를 해야 한다. 새로운 도전이기도 하지만 불편함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나 이제는 낯선 것과 친해지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사이동 몇 개월 전부터 여러 가지 시그널이 접수되어 본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기에 주변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나주를 떠나면 먹어보기 힘든 홍어삼합도 먹어보고 휴일에는 그간 봐 두었던 낚시 포인트에 가서 열심히 낚시도 했다. 선후배님들과 수차례 송별식도 했고 마지막으로 회사 연못에 풀어놓은 붕어들에게 먹이를 충분히 주었다.
몇몇 친하게 지냈던 처장들도 멀리 모로코로 갔고, 누구는 원치 않은 임지로 갔다. 그중 K처장은 입사동기다. 신입사원 시절을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기에 형제처럼 마음이 잘 맞았고 업무능력도 탁월했다. 내가 인천으로 발령 난다는 소문이 돌자 집 근처로 가는 것이니 영전해서 좋겠다며 축하인사를 하러 왔다. K처장도 사업소로 보낸다는 이야기가 나돌자 주위에서 본사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임원들에게 사정을 해보라고 권했지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슨 사정을 해야 하나, 샐러리맨이 발령 나면 임지로 가는 것이지.’하면서 일축했다. 올곧고 씩씩한 K처장은 부임하기도 전에 발주처에서 승용차를 한 대 사줬다고 사진을 보여줬다.
‘K처장, 잘했어 굴하지 않는 생활을 했으니 영전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임원들에게 보직 사정하러 다니면 존경했던 후배들이 실망한다. 당신이나 나나 어느 보직을 줘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또 우리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회사 내 음양의 조화가 맞는다. 게다가 기사 딸린 승용차(외국이니 외제차)도 주지, 발전소 내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세끼 해결해주지, 해외수당도 받고 게다가 싫은 얼굴 안 봐도 되니 영전 중의 영전이다. 가족들과 떨어지는 것이 문제인데 이곳 나주에 있을 때도 2~3주에 한 번씩 가족을 봤는데 기간만 조금 늘었을 뿐이니 그것만 참으면 된다. K처장도 영전이니 잘되었다.’
지난 2년 동안 전공과 무관한 것은 둘째치고 생소하기만 했던 각종 소송들로 인해 공부는 많이 했다. 막걸리 한잔 할 때면 ‘간통 사건 빼고는 모든 케이스의 소송을 하고 있다. 송사를 하려면 나에게 자문해라.’하며 농담했지만 지루하게 이어지는 소송과 민원으로 심적 부담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주위 동료들이 힘든 일을 내려놓았고 집 근처로 가니 영전이라 하지만 영전은 아니다. 하지만 나주 본사에 근무하다 인천에 온 나 자신도 좌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과 가까워졌고 100여 명의 식구들과 어떻게 하면 출근하고 싶은 사업장을 만들 것인지 고민하면 되니 고민의 폭과 깊이가 줄었다. 사무실 창밖으로 서해바다, 갈매기 날고 어선이 오가며 멀리 영종대교도 보이니 눈과 마음까지 시원하다. 물 좋아하는 놈이 물 많은 곳에 왔으니 영전이다.
Gas Turbine발전기 수리, 부품 재생과 생산을 담당하는 GT정비기술센터가 전력산업과 국가경제에 기여한 공은 지대하다. 외국산 부품을 국산화에 성공하자 제작사에서 납품 가격을 대폭 낮추었고, 외국인 기술자들이 하던 업무를 우리 직원들로 대체하여 엄청난 외화유출을 예방했다. 현재는 세계경제 및 국내 경제 침체로 인해 전력예비율이 높아 발전단가 높은 가스터빈 발전소가 정지했다. 덩달아 GT센터 사업이 축소되었지만 2018년부터는 완만한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가 회복되고 발전소 가동률이 높아지면 예전처럼 불이 꺼지지 않는 공장이 될 것이다. 정체기를 맞고 있는 이때 미래를 준비하고 제2의 부흥기를 위해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고민해야 하니 중요한 시기이고 중요한 업무를 담당했으니 영전이다.
좌천이 아니라 영전이라 하면 좌천시킨 인사권자가 기분 나쁠 수 있으나 어떠한 자리나 직위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청소하시는 분도 지구의 한 귀퉁이를 깨끗하게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청소한다면 얼마나 소중하고 복된 직업인가. 얼굴 찡그리며 있는 힘을 다해 돌은 쪼고 있는 석공은 등뼈가 휠 정도로 어렵고 힘든 직업이 석공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노래 부르며 행복하게 돌을 쪼고 있는 석공은 성모마리아를 모실 위대한 성당을 짓고 있는 사람이다. 어느 자리, 어느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 의미와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손에 쥐고 있는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권력의 크기로 좌천과 영전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지난 2년 동안 형제같이 지냈던 송변전 노동조합 위원장 협의회 의장이 고맙게도 축하 난을 보냈다. 분홍색 리본에 쓰인 ‘祝 榮轉’이란 단어는 내가 좋은 자리로 가서 쓴 것이 아니다. 단어의 속뜻은 의장님과 나만이 알고 있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