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큼털털한 사치의 밤은 속절없이 깊어만 가고
4월 중순이 되니 어김없이 배꽃이 만개했다. 온통 하얀 꽃으로 뒤덮인 나주시 금천면은 이맘때가 가장 분주한 것 같다. 웃자란 가지의 전지작업은 초봄에 시행되었으나 개화시기에 수정을 하지 못하면 일 년 농사를 망치기에 인공수정하느라 배꽃 아래에서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그 많던 벌과 나비는 어디로 갔는지 그 자리를 중국, 베트남 외국인 근로자들이 대신하고 있다.
벚꽃은 화려한데 비해 하얀 배꽃은 소박하다. 소박해도 들판을 뒤덮은 배꽃 풍광은 장관이다. 분홍색 복숭아꽃의 개화시기가 엇비슷해 하얀 배꽃과 군데군데 분홍색 복사꽃이 어우러져 있는 풍경은 보는 이의 정신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따로따로 있을 때 보다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동양화와 가까운데 저수지와 둠벙이 많은 이곳에서 낚시하다 보면 찌를 안 보고 아름다운 경치만 볼 정도다.
절경의 백미는 보름달 아래 배꽃 구경을 하는 것으로 ‘花無十日紅’이라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하니 부서 식구들과 서둘러 봄꽃 구경에 나서야 한다. 옛날부터 달빛 아래 배꽃은 멋진 풍경이었던 듯하다. 고등학생 시절 모두가 배웠을 이조년(1269~1343)의 시조 ‘多情歌’는 봄바람난 春情을 노래한듯한데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 제
一枝春心을 자규야 알랴마는
多情도 病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위의 다정가를 굳이 풀어쓴다면
배꽃에 달빛이 하얗게 부서지는 늦은 밤
작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봄바람난 내 마음을
짝을 찾는 소쩍새가 알리야 없지만
정이 많은 것도 병인지 잠을 이루지 못하노라
달빛 흐르는 밤, 우리 처 식구들은 배나무 밭에 모여 막걸리를 한잔했다.
포근한 달빛이 흐르는 밤
배꽃과 복사꽃 어우러진 그림 아래
막걸리 한잔 마시는 것은
분에 넘치는 인생의 사치이다.
술 중에 가장 싼 술이지만
좋은 친구와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막걸리는
세상에서 가장 사치한 술로 둔갑한다.
한복 입고 가야금 뜯는 아낙이 없어도
남정네들의 두런거리는 대화는
시가 되고 음악도 된다.
무릉도원은 어드메이며
젖과 꿀이 흘러넘치는 가나안은 또 어디인가
술과 꽃이 지천인 이곳이
천당이나 극락이 아니겠는가.
친구들과
배꽃 아래 복사꽃 아래
오고 가는 탁주 한잔
맑게 흐르는 달빛 따라
취기가 오르고
꽃잎은 나는데
시큼털털한 사치의 밤은
속절없이 깊어만 가고
술병은 진작에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