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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敗者無言(패자무언)

다음 편지의 제목은 勝者有言(승자유언)으로

by 물가에 앉는 마음

올림픽을 하게 되면 우리 선수들이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에 전 국민이 환호하고 국가별 순위에서 몇 등을 차지했나 관심을 기울인다. IOC에서는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 하여 국가별 순위를 매기지 않지만 많은 나라에서는 순위를 매기고 있다. 메달 전체 합계로 순위를 매기기도 하고 금메달이 우선이고 금메달이 同數이면 은메달 수로 순위를 정하는 나라도 있으며 우리나라도 이와 같이 순위를 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은, 동메달에 대해서는 유난히 薄(박)하다. 금메달리스트가 아니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기억에서 사라진다.

스포츠와 비즈니스의 비슷한 측면은 2등을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입찰 시장에서 2등은 꼴등이나 마찬가지이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입찰 시장에서 1등은 勝者이며 나머지인 2등부터 꼴등까지는 모두가 사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며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공기와 같고 입찰서류는 바로 廢紙(폐지)가 된다.


가공송전분야는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여 향후 먹거리가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에너지 저장장치(ESS: Energy Storage System) 건설시장이 눈에 띄었다. 신재생에너지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ESS 시장도 향후 급속도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나 현재 보유한 인적자원이나 기술 인프라를 보면 ESS 등 신규 사업을 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금년에 준비 작업을 하고 내년부터 입찰에 들어가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담당 팀장은 나보다 용감했다. 시장 진입 시점을 고민하는 나에게 한번 부딪쳐 보겠다고 한다.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아 수주전에 뛰어드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되었으나 아무래도 겪어야 하는 홍역이니만큼 매를 먼저 맞기로 했다.

신규사업팀이 주죽이 되어 Project Team을 구성했다. 우리 회사가 부족한 설계 부분은 지인에게 SOS를 쳤다. 기술연구원과 설루션 그룹, 지인 회사 기술자들로 Team을 구성하여 ESS건설공사 수주전에 뛰어들었다. 처음 시도하니만큼 시행착오는 당연히 겪어야 하며 수주에 실패한다 해도 우리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2달여 우여곡절을 겪고 고생하여 입찰서류를 접수시켰다. 승패를 떠나 휴일도 반납하고 입찰서류를 만들었던 우리 식구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미 실적업체들이 진을 치고 있기에 어렵다고 생각했고 처음 시도하는 사업이니 실패는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입찰 발표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탈락했다.

입찰 가격은 최대한 낮췄으나 더욱 낮게 들어온 업체도 있었다. 100억짜리 공사에서 100원 차이로 2등을 했어도 2등이 아닌 패자다. 기술평가 부분에서도 실적업체와 차이가 있었지만 중위권을 차지하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물론 우리 회사는 ESS 시장에서 만큼은 신생기업이나 마찬가지이니 진입장벽이 높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회사와 마찬가지로 신규 진입을 시도했던 재벌기업들 모두 탈락했다.

예견되었던 탈락이었지만 추진했던 팀원들의 상실감이 심했다. 위로 회식을 했는데 입찰에서 떨어져 취하기까지 하면 추해 보일까 봐 입에 술을 대지 않는 직원들도 있었다. 낙담한 식구들이 많아 덩달아 마음이 무겁다. 물론 본인들이야 속이 더욱 쓰리겠지만 마음과 머리가 아파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심하면 3천 개 업체가 투찰 하는 입찰 시장에서는 온갖 방법이 동원된다. 응찰가를 계산하는 프로그램은 모든 업체가 사용하며 커다란 프로젝트에 입찰하는 날에는 절에 가서 또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담당자도 있다. 연초에는 점집에 가는 사람도 있고 명당에 가서 기를 받고 오는 사람도 있다.


'사내 많은 부서에서 인적, 물적으로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지만 수주에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패인을 분석하고 다음에는 과학적/비과학적 방법도 동원해 봐야겠지요.'


敗者無言인데 말이 너무 길었다.

다음 편지의 제목은 勝者有言(승자유언)으로 보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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