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를 던져 느낌표가 나오면 직진하시고 아니면 놓아 버리세요.
인문학의 시작은 질문이다.
생각이 사라진 시대, 잃어버린 질문을 되찾기 위한 아홉 사람의 인문학 강의
2015년 1월 4천 명 관중이 모였고 이틀 간에 걸쳐 ‘생각의 시작은 질문’이라는 화두로 진행된 박웅현, 진중권, 고미숙, 장대익, 장하성, 데니스 홍, 조한혜정, 이명현, 안병욱 등 9명 연사들의 이야기와 생각을 담은 책.
요즈음은 책들도 광고를 잘해야 베스트셀러가 되니 책에 붙어있는 띠지에는 낚시용 멘트들이 많다. 사실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낚시질에 걸린 것이 아니라 1 저자인 박웅현 씨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1. 왜는 왜 필요한가? By 박웅현(카피라이터)
인생의 즐거움은 느낌표를 찾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느낌표가 있으려면 먼저 물음표가 있어야 합니다. 질문이 많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끊임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신이 말했기 때문에 그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것이 옳기 때문에 신이 그렇게 말한 것인가?’ 이 질문은 신의 말은 어떤 경우에나 옳은가? 신이 거짓을 행하라고 명령하는 경우는 없는가? 등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질문인데 질문은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지금은 어떤 시대입니까? 신의 자리에 돈을 앉히면 맞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묻지 않습니다. 무엇을 원하고 왜 하는지 질문을 던지지 않아요. 질문은 돈을 버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어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도움이 안 된다며 책도 읽지 않고 대신 취업공부를 하며 스펙관리를 합니다. 예전에는 선생님이 고전 읽기를 권했는데 이제는 책을 읽으면 수능시험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하면서 책을 못 읽게 합니다. 왜 수능시험에 나오는 것을 익히는 것만 가지고 공부라 할까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모인 외국어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왜 공부합니까?’ ‘좋은 대학 가려고요’
‘왜 대학에 가고 싶어요?’ ‘좋은 직장에 가려고요’
‘왜요?’ ‘돈 벌려고요’
‘왜요?’ ‘결혼하려고요’
‘왜요?’ ‘애 낳고요’
‘왜요?’ ‘좋은 교육시켜야죠’
‘왜요?’ ‘좋은 대학 보내야죠’
학생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게 뭐지’ 싶었던 거죠. 그중 한 아이가 철학 전공을 선택했습니다.
(역시 박웅현 씨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위 질문을 몇 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같은 질문과 대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성인을 넘어 꽤나 나이를 먹었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自問自答해 보면 기가 막힙니다. 인생을 헛살았다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 대학에 갔는가?’ 부모님과 선생님이 가라 해서 대학에 입학한 것이 아닐까요? 나 자신을 채우고 있는 요소가 엄마, 아빠, 선생, 선배로 정작 본인이 빠져 있다면 질문하지 않는 사람의 몸입니다. 유럽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일단 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에 맞춰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갑니다. 그래서인지 그곳 대학 학생들의 나이대가 다양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습 아닌가요?
우리는 공부를 너무 편협하게 생각합니다. 수학만큼이나 춤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그리고 권위에 눌려 삽니다. ‘서울대 다닌다고 하면 다 맞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교수라고 하면 존경할만한 사람일 거야’하고 믿지만 최근 사건들을 보면 성추행을 하는 교수, 부인 폭행하는 의사도 있습니다. ‘동의할 수 없는 권위에 굴복하면 안 됩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며 대신 동의할 수 있는 권위에는 굴복하는 것이 멋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권위가 나를 누를 때 물음표를 던져 느낌표가 나오면 직진하시고 아니면 놓아 버리세요.
2. 우리는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By 진중권 (동양대 교수, 논객)
대의 민주주의는 대표를 뽑아 그들이 우리의 뜻을 대변해 체제를 이끌어가도록 하는 제도인데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여러분을 대의한다고 느끼나요? 선거 때마다 ‘우리가 남이가?’하는데 그들은 남입니다. 여야 의원들이 서로 싸우는데 사실 여야끼리 친하고 지역 구민하고 안 친합니다. 카메라 앞에서는 싸워도 카메라가 지나가자마자 여야를 막론하고 수다를 떱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에 신물나서 관심조차 갖기 싫어집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 가족관계까지 망가지기 십상이고 정치인들만 보면 열받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정치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저는 직업적 정치인은 아니지만 당비내고 당을 위해 일을 하니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정치를 싫어할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정치적 활동을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정치를 ‘덕을 실현하는 행위’로 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국가공동체 안에서 정치적 활동을 할 때 진정으로 인간다워진다 했습니다. 바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뜻이지요. 다른 한편 자유주의자들은 ‘정치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행위’로 봅니다. 국회 내에서 일어나는 논쟁은 사회 계층 간 이권 조정 과정에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해결될 문제도 국회로 들어가면 해결 불가능한 난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릅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소통하려면 공통분모가 존재해야 하는데 강요해서는 안 되며 구성원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토론을 통해 합의점을 도출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도출된 결론이 상식인데 저는 상식을 형성해가는 과정이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거둔 사이 권력이 기업가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공익을 추구해야 할 정치가 사익을 추구하는 대기업가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칙을 열심히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끊는 것은 우리 삶을 새로이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고 그저 남이 내 운명을 결정하게 두는 행위와 같습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 안에서 끊임없이 헝거게임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3.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By 고미숙(고전평론가)
동양적 관점에서 보면 공부한다는 것은 몸에 힘을 빼는 것입니다. 긴장해서는 절대로 고수가 될 수 없어요. 몸의 경직성이 커지면 세상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배운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천지와 소통한다는 의미이고 여러분이 릴렉스 된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은 유동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반대 의미의 질문은 ‘내 삶의 노예로 살고 싶은 자도 있는가?’ 그런 사람은 없지요. 하지만 노예가 되기는 쉽고 주인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현대인들은 학벌, 직업, 서열을 떠올리며 이로부터 소외되었으니 주인이 되기 어렵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면 중상류층이 주인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일까요? 정서적 흐름으로 설명하자면 하나는 두려움, 다른 하나는 충동입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면 겁을 먹고 포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두려움’이고, 수업을 받으러 가는 도중 문득 ‘신상’을 사고 싶은 생각에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게 된다면 이것이 ‘충동’입니다. 두려움과 충동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면 이를 제거해야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사회구조에서 오는 억압과 소외가 원인일 수 있습니다. 을의 위치에 있고 자유를 억압당할만한 조건에 놓여 있다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물론 가족이나 친구관계에서도 있습니다. 동양사상에서는 이보다 더 근원적인 두려움의 원인을 생로병사에서 찾습니다. 충동의 발생원인으로는 쾌락과 욕망을 들 수 있고 그중 가장 원초적인 욕망은 식욕과 성욕입니다. 요즈음 ‘먹방’이 대세인데 이글대는 욕망이 매체를 장악한 것이지요. 지혜와 자유를 얻는데 학벌이 필요하지 않으나 죽도록 공부해 학벌을 얻고 좋은 직업, 서열 상승으로 성공합니다. 하지만 또다시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성공한 사람, 정치인들에게 성범죄가 많은 것은 바로 지배욕과 성적 호르몬이 같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정직해서 물질적 보상을 바라지 않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공하고 남부럽지 않은 상황이 되어도 정신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성공할수록 감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넘치는 것은 조율하고 모자란 것은 채워야 하는데 이것이 공부이고 수행입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두려움이 자라고 강박증, 분열증을 거쳐 영혼이 잠식됩니다. 두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소통을 못하는 사람은 게임, 야동으로 도망가려 하는데 어느 날 중독되고 본인 문제를 사회, 부모에게 돌리고 폭력적이 됩니다. 두려움, 충동, 원망, 폭력이 하나의 사슬이 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찬 묘비명을 소개드립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