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인생들이 自問自答을 하고 있다.
나주에서는 서울과 달리 새벽같이 골프를 치러가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 이야기로 “상놈도 아닌데 왜 새벽부터 설치는가 몰러? 아침밥 먹고 느긋하게 가서 운동 해야제” 지천에 골프장이 있어 서두르지 않아도 공을 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느린 것이 체질화되어 있는 듯하다. 좋아하는 낚시질 또한 새벽잠을 설치면서 좋은 포인트를 선점하려는 경쟁이 없다. 향토 음식도 홍어, 곰탕 등 Slow Food이며 주문한 음식이 늦는다고 악을 쓰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느린 것이 이곳 생활이고 문화이다.
수확이 끝난 너른 나주평야와 영산강에 은빛 갈대가 춤을 추는 11월이지만 아직도 가을이다. 12월 말이 되어야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니 느린 것이 당연한 나주에서는 계절도 한 박자 느리다. 1월이 되면 흐르던 개울물은 얼음이 되어 멈추고 나무도 잎을 떨구고 멈춰 선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연의 섭리이자 세상의 이치이다. 2월, 추운 바람이 매서워도 꽃을 피운 매화는 짧은 겨울의 종막을 알리고 봄이 되어 개울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나무도 움을 틔우며 바위와 산도 덩달아 움직인다.
3월의 노란 개나리는 본격적인 봄을 알린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상춘객을 불러 모으는데 아마도 그들은 바람 불어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꽃잎의 슬프도록 장엄함을 보러 오는지 모른다. 벚꽃이 화장을 한 도시 여인네라면 벚꽃에 연이어 피는 배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수줍은 시골 색시의 모습이라 더욱 정겹다. 서울에서 자취를 감춘 제비가 집을 짓기 시작하면 4월이 되었고 나주 배꽃은 4월 중순이 절정이며 달빛 고운 날 진분홍 복사꽃 아래 친구들과 막걸리 한잔 나누는 4월은 개구리울음소리와 함께 지나간다.
계절의 여왕 5월은 모든 것이 아름답다. 공사가 한창이며 조경이 덜 되었지만 혁신도시 가로수인 이팝나무는 하얀 꽃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한편 모내기가 늦은 남녘은 5월 말이 되어야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다. 봄과 여름이 교차하여 따끈한 볕에 졸다보면 어느 틈엔가 6월 여름이 온다지만 올해 나주의 5월은 여름같이 더웠다.
습도가 낮아 적당하고 기분 좋게 더운 6월, 가물어 걱정이 많았는데 월말에 내린 장맛비가 한층 반갑고 청량하다. 올봄 밤낮의 기온차가 심해 배꽃의 수정도 어려웠고 꽃이 빨리 떨어졌단다. 寒害로 인해 이런 흉작은 30년 만에 처음이라니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지는 6월이나 뒤늦게 내린 비로 인해 배가 수박 만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7월의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더위도 죽을 맛이지만 습도가 높아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거리는 날씨는 웬만한 인내심으로는 이기기 어렵다. 사람을 삶고 구워 지치게 만드는 7월의 심술을 헤어날 방법은 마땅치 않다. 복달임으로 삼계탕을 먹고 숨죽이며 7월이 가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끈적거리고 뜨거워도 참아야 하는 것 역시 자연의 섭리다.
지루한 늦장마가 끝나니 신기하게도 매미가 울어대기 시작한다.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굽는 듯한 8월 더위가 시작되나 입추를 지나니 밤에 부는 바람은 시원해졌다. 반짝이는 8월의 햇살은 모든 것을 살찌우는 밑바탕이 된다. 어느덧 성장하여 날아다니는 꼬마 제비 날개가 빛난다. 검은 벨벳 연미복을 뽐내지만 아직은 어미에 비해 날렵하지도 못하고 땅땅한 몸매의 未生이다. 어디선가 들리는 귀뜰 귀뜰 귀뚜르... 여름은 갔고 가을을 재촉한다.
실팍한 잠자리 날개가 닳아 힘을 잃을 무렵인 9월은 붕어가 살을 올리는 계절이고, 모든 곡식도 여물고 과일도 맛을 더한다. 농부의 발걸음을 듣고 자란다는 과일과 곡식이 무게를 더해 늘어진 가지가 위태롭게 보인다. 10월은 수확의 계절이며 풍요의 계절이다. 지난해 나주배의 당도가 떨어져 맛이 덜했다고 하나 올해는 단맛이 일품이며 과즙이 풍성할 듯하다.
혁신도시에 이맘때 내려와 벌써 일 년이 흘렀으나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순서에 맞게 피고 지고 여물고 수확 된다. 하지만 땀을 흘린 자가 많이 수확하고 게으른 자의 곡간이 허전한 것이 순리이듯 일 년을 살아보니 느리기는 해도 순서를 바꾸지 않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자 이치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 아이들도 바쁘게 뛰어다닌다는 분당에서 한없이 느리디 느린 나주에 내려와 “느림”에 적응하고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허름한 주막에 자리 잡고 앉아 오래된 친구들과 탁주 한잔 나누는 여유를 오랜만에 즐기면서 주정하고 있다. “오래된 친구와 소박한 안주에 막걸리 한잔, 이것이 인생사는 맛이 아닌가?” “남들보다 빨리 가기 위해 지난 30년간 정신없이 뛰었지만 지나 보니 남들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뒤늦게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술 취한 인생들이 自問自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