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세상의 크기는?
500원짜리 동전 한 닢
우물 안 개구리가 보는 세상 크기는 500원짜리 동전 한 닢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를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송변전 업무를 처음 하면서 느낀 점입니다. 원자력과 R&D 분야에만 종사하다 송변전 업무를 접하다 보니 내 시야가 좁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원자력과 R&D 분야에서는 유명하지 않아도 외부에서 전문가 대우를 받았으나 송변전에 오니 초등학생 수준입니다. 지식이 없으니 500원짜리 동전 한 닢은 커녕 세상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화력발전소는 민간업체와 경쟁하는 곳이 많아 화력 근무하는 직원들 마음가짐은 원자력발전소 근무하는 직원들과 다릅니다. 물론 원자력은 절차를 준수해서 차근차근 업무해야 하는 특성이 있으며 경쟁 사업소가 적기에 수평적 비교를 할 수 없습니다만 화력은 비교대상이 있고 경쟁상대가 옆에서 일하고 있으니 상대를 의식해야 합니다. 시범운영이기는 하나 올해부터 송변전 사업에도 경쟁이란 놈이 도입되었습니다.
경쟁이란 놈은 양면성을 갖고 있어 당사자는 어렵지만 즐기는 자는 행복합니다. 모두들 축구, 야구를 좋아하실 텐데요. 동네 치킨집이 하나 있을 때와 두 개 있을 때는 분명 다릅니다. 축구나 야구중계를 하는 날에는 치맥이 제격입니다. 치킨집 하나가 독점했을 때는 입맛에 맞지 않아도, 친절하지 않아도 할 수 없이 A치킨을 시켜 먹었으나 B치킨집이 하나 더 생기니 상황이 달라졌고 치킨집 사장님들은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맛, 친절, 서비스, 가격 등을 비교, 평가하여 우위에 있는 B치킨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소비자 권리지요. 치킨집 사장님들은 맛을 내기 위해 연구할 것이고, 배달맨에게 치킨이 식기 전 배달해야 한다고 교육해야 하며,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청결한 가게를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청소해야 합니다. 또한 10번 주문하면 1번을 공짜로 주는 이벤트도 하니 소비자 행복지수도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B치킨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C치킨집이 생길 수도 있고 치킨을 대체할 수 있는 D피자, E족발, F순대, G만두집도 경쟁 상대입니다. 축구 볼 때 치맥만 먹으라고 헌법에 나와 있지는 않으니까요. 한술 더 떠서 H안동찜닭집에서는 냄비와 가스레인지까지 세트로 배달하니 그야말로 점입가경이고 야식 무한 경쟁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정비시장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정부 정책에 의해 육성된 민간정비회사는 우리 회사 퇴직직원들을 채용해 기술력을 갖췄고, 설비 제작사들은 A/S차원의 서비스만 제공하다가 본격적으로 정비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국내 제작사뿐 아니라 해외 제작사도 설비는 싸게 팔고 이후 부품 교체와 정비 등 After - Market에서 수익을 챙기는 전략을 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회사가 종합정비회사 격이라면 틈새시장을 노리는 단종 업체들이 생겼습니다. 단종 업체들은 특정설비만을 대상으로 전문화되어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정비시장에도 또 다른 치킨집, 피자, 족발, 순대, 만두집에 냄비와 가스레인지까지 세트로 배달해주는 안동찜닭집까지 생긴 겁니다.
발전회사가 한전으로부터 분리된 지 15년 넘었고 민자 발전소도 많이 생겼으며 향후 신재생에너지 분야는 큰 폭으로 성장할 것이므로 전력사업도 경쟁이 가속화될 것이며 송변전 정비시장 또한 경쟁체제 도입은 시기상 문제만 있을 뿐 불 보듯 명확합니다. 하지만 경쟁 도입 전 발전 정비시장을 바라보는 우리 직원들 생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설마’였습니다.
설마, 내가 퇴직하기 전 민간 기업이 정비시장에 들어오겠어?
설마, 공기업인 우리 회사가 잘하고 있는데... 별일 있겠어?
사실 제 자신도 IMF 구조조정, 회사 매각 시도 때도 같은 생각을 했었지요.
문제 간부들을 퇴출시킬 때도
설마 내가 포함되겠어?
회사를 매각하기 위해 실사단이 왔을 때도 설마 회사가 매각되겠어? 매각된다 해도 설마 내가 위험해지겠어?
눈앞에서 경쟁이 도입되고 실사가 진행되는데도 ‘설마’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변화와 혁신을 본능적으로 부정하고 거부하고 싫어하는 인간의 위안적 자기 암시였는지 모릅니다.
송변전 식구들이 보는 경쟁의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