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데는 사회적 비교가 결정적 역할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선진국이 아닌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이며 이중 네팔 국민소득은 2011년 644달러이다. 세계 최빈국중 하나인 네팔 국민들 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비교대상인 주위 사람 모두가 빈한하며, 종교 영향으로 내일을 준비하지 않는데 원인이 있을지 모른다. 네팔은 종교적으로 힌두교가 81%, 불교가 11%인 나라이다.
힌두교의 일관된 정신과 불교 윤회사상의 원류가 된다는 인도 고대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풀벌레가 풀잎 끝에 다다르면 다른 풀잎을 잡고 건너가듯이 살아 있는 생명은 지금 머물고 있는 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다른 육신으로 건너간다.’
힌두인 들은 엄격한 카스트제도에 의해 지금 최하층 천민계급으로 태어난 것을 전생의 업보로 믿기에 불만 없이 이를 감수한다. 그러므로 현세의 삶을 못 살아도 선하게 살아 내세에는 상층계급으로 태어나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영겁의 굴레에서 보면 현세는 극히 짧은 찰나의 시간이기에 고통을 참고 감내하는 것이다.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잘 죽어야 한다는 말과 통하고 잘 죽어야 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 즉 解脫(해탈)을 뜻한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네 삶은 어떤가? ‘연금, 노후대책, 보험, 85세까지 10억이 있어야 한다.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 때문에 더욱 불안해하고 불행해지는 것은 아닌지? 퇴직 후 일자리가 있고 10억이 있다면 죽기 전까지 행복할까? 과연 이것이 행복일까?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오히려 초조해하다가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오래전에 본 TV프로그램내용이라 생각이 가물가물하지만 전체 줄거리는 이랬다. 자폐아를 가진 부모가 한국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발리로 이사했다. 수영장이 달린 저택이지만 한국보다 집값은 헐했다. 발리로 이사 온 이유는 한국에서는 아이를 행복하게 키울 수 없어서였다. 발리로 오니 수영장에서 마음대로 놀 수 있고 입시지옥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주변에 놀리는 아이들도 없고 아이가 행복해하니 부모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기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부모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한국에 산다면 우리가 죽은 후 아이가 행복할까요? 그때는 상황에 맞게 아이가 적응하겠지요. 우리가 죽을 때까지 만이라도 아이와 행복하다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나는 자폐아와 그 부모의 얼굴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책 소개하는 날인데 개인적 사설이 너무 길면 안 되다.
우리는 조금 알 듯 모를 듯하거나 난해한 문장이나 말을 접하게 되면 ‘형이상학적’ 또는 ‘철학적’이라 표현한다. ‘행복을 철학하다’, 제목부터 철학적인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행복추구는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보편적 목표이나 너무 자주 또는 모든 이가 이야기하니 식상해하는 주제이기는 하나 여전히 흥미진진한 주제이며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기에 행복하게 해주는 것에 대한 명상을 해봐야 한다. 행복은 물이나 바람처럼 손에 쥐었다 싶으면 빠져나가고 전혀 예상치 않던 순간에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혹은 불행이 닥쳐서야 행복을 알아보는 경우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학습을 통해 얻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신이 베푸는 특혜인지 가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으나 어느 정도까지는 길들이기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행복이 지니는 현저한 상대성이다. 문화권에 따라 개인에 따라 행복의 차이가 있다. 행복이란 우리의 감성, 물려받은 생물학적 기질, 태어나 자란 가정이나 사회, 생태환경, 다양한 만남 등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타고난 기질에 의해 행, 불행이 좌우되지만 행복에 대한 성찰을 통해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기에 행복을 철학해야 한다. 철학은 우리에게 제대로 생각함으로써 보다 나은 삶을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아테네의 에피쿠로스도 ‘철학이란 담론과 이성적 사유를 통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안겨주는 활동’이라 했다. 그래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철학여행을 제안한다.
행복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소크라테스, 예수, 칸트)
계몽철학자 칸트는 철학자답게 이야기했다. ‘행복은 반드시 도덕적 결과로써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성에 부합하는 올바른 행동노선을 준수하고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마음이 평온한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게 되더라도 상대적으로 행복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예수는 여느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열망했으며 빌라도에게 사형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올리브 산에서 체포되기 몇 시간 전 불안해했는데 제자들이 도망치라 했는데도 자신을 인도하는 진실의 소리에 충실하고자 마음먹고 죽음을 택하였다.
소크라테스도 역시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독당근 액을 마심으로써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관들에게 복종했다. 소크라테스는 행복이라는 말조차 경계했다. 정의를 소홀히 할 우려가 있는 행복한 삶보다는 선, 아름다움, 정의 등의 가치에 토대를 둔 ‘선한 삶’을 추구했다. 예수나 소크라테스는 지상의 행복보다 더 숭고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희생했지만 죽은 후에 누리는 지복을 믿고 그것을 열망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세네카는 ‘그대보다 행복한 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그대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했다. 전 세계에서 시행되는 사회학 조사에 따르면 돈이 개인의 행복에 결정적 요인이 되지 않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1945~ 1970년 사이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무려 60%나 비약적으로 상승했지만 스스로 ‘매우 행복하다’고 평가한 국민의 비율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신앙과도 같이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 따른 경제적 번영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나 근간을 흔든 것이다. 영국은 국가의 부가 3배로 증가했지만 ‘매우 행복하다.’고 답한 비율은 1957년 52%에서 2005년 36%로 오히려 하락했다.
연구 결과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데는 사회적 비교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현상을 두고 작가 쥘 르나르는 촌철살인의 유머를 남겼다. ‘내가 행복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남들이 행복하지 않아야 한다!’
* 우리 선조들은 서양 학자들의 사회학적 조사에 의한 연구나 작가 ‘쥘 르나르’ 이전 그런 사실을 알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 남보다 내가 잘 돼야 배도 아프지 않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