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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 言辯(언변)

현실은 언변도 부족하고 필력도 딸린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회사를 오래 다니다 보니 앞에 나서는 기회가 종종 있지만 사실 숫기가 없어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기 위해 처음 만나는 사람들 모임에서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성격개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사유로 웅변할 기회도 적었고, 말하는 능력도 퇴보하고 목소리도 작아 기껏 위안을 삼는 것은 ‘나는 천생 사기꾼은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 어쩌면 자조적인 면도 있다.

아무튼 후천적인 면도 있겠지만 조리 있게 말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웅변학원을 다녀 언변이 좋아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공학을 전공한 정치인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학문, 학습과 언변의 상관관계가 있는 듯하다. 사실 공학을 전공하면 뇌가 공학적으로만 발달한다. 졸업 후 취업해도 공학과 관련된 직장에서 전공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니 언행도 자로 잰 듯 정확하고 예리한 정도가 심해진다.


신입사원 면접에 자주 불려 들어가는 편이다. 공기업은 요즈음 ‘블라인드 면접’을 하므로 출신학교, 이름, 가족관계 등 대부분의 정보가 차단된 상태로 면접을 보는데 언변이 떨어지는 응시자들은 아무래도 불리하다. 면접위원장만 제출서류를 볼 수 있어 선입견이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학력별로도 언변 차이가 있으며 학과별로도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답을 하는 친구들은 소위 사무직으로 응시한 법정, 경상계열 출신들이고 기술직으로 응시한 공학을 전공한 친구들은 나만큼은 아니지만 허술하다. 성별로도 차이가 있는데 특히 법정계열 여자응시자들 언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기술계열 여자응시자들도 남자응시자들 언변을 압도한다. 다섯 명씩 들어오는 응시생들 중 여자가 끼어 있다면 남자 응시생들은 심하게 말하면 바보처럼 대비된다. 말 잘하는 순서로만 신입사원을 선발한다면 회사는 여자들로 넘쳐날 것 같다.


본사도 회의가 많지만 발전소에도 회의가 많다. 특히 원자력발전소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품질보증을 해야 하는 특성상 서류와 회의가 많다. 근무 직원들은 농담 삼아 원자력발전소는 핵연료가 아닌 서류로 돌아간다고 할 정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의는 언변에 의해 결론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절차서(Procedure), 제작사지침서(O&M Manual), 규격서(Code& Standard)를 놓고 벌어지는 진실규명 게임이다. 설비고장이 발생되면 고장 원인부터 명확히 밝혀야 한다. 고장 원인이 밝혀져도 ‘추정적 원인’이 아닌 기술적 타당성이 논리적으로 맞아야 다음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면 감독기관에서 재가동을 허용하지 않으니 원인규명은 매우 중요하고 참여자 모두 형사 같은 자세로 현상을 쳐다본다. 원인규명이 되면 재발방지를 위해 제시된 정비방법이 절차, 지침, 규격과 일치하는지 검토되고 서류화 되어야 한다. 이렇듯 벌어지는 사항들은 사람과의 논쟁이 아닌 기계의 메커니즘, 논리회로, 지침과의 일치성, 정비 방법의 역 검증 등 논리적 게임이다. 이런 경우는 언변이 없어도 되고 밤새워 일해도 덜 피곤하다.


사람과의 회의는 상대방 의도, 취향, 그날의 기분과도 관련 있으므로 논리성이 확보되어도 회의에서 승리한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또한 노동조합과의 회의에서 사측은 항상 수세적일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 협상전략 자체가 크게 요구하여 점차 작아지는 것이고 회사 측은 작게 제시하여 점차 크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니 창 들고 싸우는 조합은 공세적이고 방패 들고 방어하는 회사 측은 수비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근 노동조합 측과 몇 번의 회의가 있었는데 사측 제안을 번번이 거절해 마음 같아서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고 싶었다. 나 혼자 잘되자고 하는 것이 아니지만 노사 상호 간 명분도 중요하고 실리도 중요하기에 절묘한 절충선을 찾는 협상기술이 필요하다

회의가 끝나고 저녁 식사 전 로또 복권 20장을 사서 ‘당첨되면 사표 쓰세요.’하면서 위원장들에게 한 장씩 나눠줬다. 누군가가 로또복권에 당첨되어 사표 낸다면 반대하는 목소리를 한 명 줄일 수 있어 협상에 도움이 될 테니 진심으로 당첨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공돈 2만 원만 날린 셈이 되었다.


웅변을 잘해 상대방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언변부재가 아쉽다. 나는 말솜씨가 없으니 주로 편지를 써서 내 의도와 뜻을 전달했다. 그것도 직설적 표현보다는 간접적 표현을 주로 쓰니 즉시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현실은 언변도 부족하고 필력도 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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