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1), (이철수著, 삼인刊)
벌써 세 번째 엽서 책을 냅니다. 저녁마다 당신들을 떠올리면서 빈 엽서를 꺼내놓습니다. 조용히 제 하루를 돌아보고 짧은 편지를 썼지요. 날이 갈수록 엽서를 받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많은 당신들 앞에 드리는 짧은 편지는, 어쩔 수 없이 제 감정의 기복에 따라 얼룩지곤 했습니다.
다 기억하지 못하는 흘러가버린 감정의 무늬들- 부쳐버린 엽서들, 걱정스럽습니다.
당신 앞에 도착한 엽서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을까? 짐작하기 어려워 서지요.
세상은 날이 갈수록 강팔라지고, 마음도 몸도 고요한 순간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의 거친 흐름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 안에서 괜찮으신지요?
모르겠습니다. 모르시겠지요?
이대로 이렇게 흘러가는 세상 괜찮은 건지. -2006.06-
인생 결산
날이 차가워서 뜰에 내린 눈이 오래 그 자리에 있다.
마음에 생긴 상처를 보는듯하다. 한 오십년씩 살고나면 마음이 상처투성이겠지?
양지의 눈은 쉬 녹고 음지의 눈은 오래 가듯, 마음도 그럴 거라!
집에서는 가장이라고, 직장에서는 상사라고, 속내를 드러내 하소연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인생이 대부분일거라!
마음의 눈에서 녹아내리지 않는 눈밭이 만만찮게 넓다고 느끼는 오십대의 송년이다.
겨울 깊어가고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해는 바뀌지만 시린 겨울은 아직 많이 남았다.
인생이 언제나 양지바르기를 바란다면, 그건 아직 철이 덜 들었다는 뜻이겠지?
음지 양지에 한눈파느라고 해떨어지는 것 잊고 살아서도 안되는 게 인생 아닌가?
기쁘고 슬픈 일 아프고 보람 있고 행복했던 것 두루 우리 재산이라고 생각해야, 연말 손익계산이나 인생결산이 허탈해지지 않을 것 같은데?
바닷가에서
파도치는 바닷가.
어판장에는 배가 출어하지 않아 고기가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바닷가에서 풍어제 한창이면,
바다 밑에서는 물고기들이 초상을 치를 거라는
일본 여인의 동시가 떠올랐습니다.
존재의 촛불
운동화 한 켤레 값이 무서워 고민하는 수녀님을 만나면 세상이 문득 밝아 보입니다.
진료비 2만원이 너무 부담스럽다는 신부님을 봐도 세상이 환해집니다.
먼 길 걸어오시는 스님을 만나면 머리카락 없는 얼굴이 그대로 연꽃등이지요.
값싼 점심을 청하는 저명인사, 다시 보게 됩니다.
이름과 제복이 존재의 밝은 빛을 가려버리지 않아서 밝습니다.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오신 분들께서 자주하시는 말씀가운데 제일 가슴 아프게 듣는 이야기는, ‘한국인들은 친구건 가족이건 모여 앉으면 돈 이야기를 한다.’입니다.
영혼의 안부보다 재산의 안부를 더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건가요?
존재의 촛불을 꺼뜨리지 않게 되기를..., 돈이 우리를 삼키게 되지 않기를
마음
밖에서 일이 있어 밥을 먹다가 아내 생각 나 길래, 도시락에 담아달라고 했습니다.
식어버린 저녁이지만 아내가 달게 먹는 건,
도시락 들고 들어온 남편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투리 천 끊어다, 동네 세탁소 아저씨의 ‘왕년의 솜씨’에 맡겨 옷을 지어다 주면
저는 그 옷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옷인 줄 알고 입습니다.
아내의 마음을 제가 아는 때문이지요.
엊그제, 그렇게 지어다준 옷이 왔습니다.
허리띠가 번거롭다고 고무줄을 넣어 만든 옷이지만, 입어서 편하고, 값도 비싸지 않아서 제 패션이 되었습니다.
세탁소 아저씨는 만원을 덜 받겠다 시고, 아내는 만원 더 드리겠다며 실랑이를 합니다.
왕년의 솜씨‘도 자존심 있으신 터라 아내가 만원 한 장 되받아 넣었습니다.
만원을 팁으로 얻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말 없는 말씀
누구나 그럴 테지요? 크건 작건 못났건 잘났건 부모의 그늘에서 쉬고 추스르고 다시 시작합니다.
제 어머니는 늘 조용한 그늘이십니다.
제 소년기에, 빚잔치하고 온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던 그날도 묵묵하셨습니다.
가난한 셋방에서 다시 모여 살게 된 어느 날도 그러셨지요.
가난도 내색하지 않고 기쁨도 내색하시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면 묵묵히 품을 팔고, 조용히 초라한 밥상을 차려 오셨습니다.
제 사춘기에 밖으로 나돌며 방황하던 시절에도, 긴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날 아침에 나갔다 온 자식인 듯 조용히 맞아주셨습니다.
말 없으셨지만, 온몸으로 하시는 말씀이 없진 않으셨습니다.
- 네 아픔을 이해한다. 미안하구나! 내가 너를 아프게 지켜보고 있다.
그런 말씀이, 침묵 속에 담겨있습니다.
입 열지 않고 말씀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