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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긴 旅程을 끝내고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

by 물가에 앉는 마음

4년 근무했지만 기술개발실 복귀前(전) 1년간 업무구상을 했으니 5년을 근무한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사장직속조직이라 조직명칭이 ‘처’가 아닌 ‘실’이지만, 조직을 살리고 카우는 일에 대해 마침표를 찍어도 될 시기가 왔습니다.

흔히 기술개발실 업무는 해도 표가 안 나고, 안 해도 표가 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만든 정책의 효과와 잘잘못에 대한 판가름이 10년 후에 나타나는 업무특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원자력정비기술센터 기본설계를 제가 했고 장기해외교육, 기술협력, 장비구매 등 수백억 원 투자했는데 원자력정비기술센터가 제대로 수익을 낸 것은 조직발족 7년 후입니다. 물론 현재는 원금회수는 물론 국부유출 예방과 많은 이익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차장시절, 기술개발처에 근무할 때는 본사직원 1/3이 기술개발처 소속이라 전 직원이 모여 회식을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만 처에서 실로 위상은 서서히 추락했고 급기야 사업소인 기술연구원에 본사인 기술기획팀이 속하는 기형적 형태의 조직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자원해서 부임했지만 정확한 실상을 파악해 보니 기겁할 정도였습니다. 인력부족으로 눈앞에 닥친 업무만 처리하기에도 급급해 이쪽 업무를 들쳐보면 2년 치 업무가 밀려있고, 저쪽을 들쳐보면 3년 치 업무가 밀려있으니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답답하고 무리한 도전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인력보강이 되는 것이 아니니 한편으로는 업무를 간소화하고 비중이 낮은 업무는 폐지시켜 업무량을 줄여나가야 했습니다.

업무 연속성이 있는 밀린 일들은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하여 100건이 밀린 사업소기술개발과제 평가는 서류심사로 대체했습니다. 사업소에서 수개월간 공들여 개발한 장비들을 서류심사로 갈음한다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성의가 없는 것이지만 심사위원들이 이 주일 간 합숙심사 해도 마무리할 수 없는 분량이 밀려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업무량을 줄이기 위해 외적요인들을 정리하고 아웃소싱을 통해 업무량을 줄였습니다.


밀린 업무 청산, 제도 개선, 신규사업을 따져보니 매우 많습니다.

o 사업소기술개발제도 잠정 폐지 및 경영평가 연계 폐지

o 자문변리사 정리 및 특성화 연차관리 전담회사 운영

o 연구과제 심의시기 일원화

o 도용 지식재산권환수

o 최초 지식재산권 판매

o 최초 기술실시권 허여

o 최초 역기술협력

o 시장진입 허용에 따른 보상금 징수

o 중간진입전략 채택

o 새로운 패러다임 'R&BD' 도입

o KPS2020 중장기 기술개발계획 수립

1년 내에 밀린 업무 청산, 2년 내에 업무개혁을 하겠다고 왔지만 제가 무모했고 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서 잘못 판단한 부분입니다. 한편으로는 밀린 업무들을 처리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업을 해야 했기에 감사실 정책감사 힘을 빌었습니다. 후임자가 와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을 시도하려 하면 임기가 끝나기에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대못 질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적된 항목이 31가지나 됩니다. 아마도 감사실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지적서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기술개발실 재도약을 위해서라면 그간 업무를 나태하게 했구나 라는 비난의 화살은 모두 제가 받도록 하겠습니다.


내 사랑 '한전 KPS'가 세계제일의 회사로 우뚝 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첫사랑 기술개발실이 회사의 10년 앞을 켜는 작은 촛불 역할이라도 했으면 합니다. 어둡고 암울한 시기가 닥쳤을 때 직원들이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촛불 좌표 삼아 앞길을 헤매지 않았으면 합니다. 연구개발을 하지 않는다고 회사가 당장 망하지 않습니다. 기술 인력이 몸으로 부딪치며 발전소를 정비하는 특이한 사업형태를 갖고 있어 연구개발을 하지 않아도 매출 1조 원인 회사가 하루아침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신기술을 개발해 매출 100억 원 정도의 영향이 있다 할 경우 전체 사업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합니다. 하지만 연구개발을 하지 않아 이러한 항목들이 10개가 쌓이고 10년 동안의 효과가 누적된다면 문제가 발생됩니다. 회사가 망하기 전까지 연구개발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제가 타고난 한 가지 복이 있습니다. 貴人(귀인)을 만나는 것인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저에게는 貴人이었습니다. 기술실을 정상화시키고자 왔는데 제가 귀인들을 만나 꿈을 이루고 가게 된 것이니 제가 타고난 복이 있습니다.

지난 4년간 불협화음 없이 기술실 식구 모두가 死而後已(사이후이) 자세로 열정을 바친 것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기술개발실 식구들에게 미안함을 느낍니다. 제가 부임한 이후 업무의 틀을 바꿨습니다. 업무의 틀을 바꾸려면 인적쇄신도 해야 했기에 사람도 모두 바꿨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 전입 와 매일 아침부터 잔소리 들어야 했던 우리 식구들의 고마움은 가슴에 간직하고 떠나겠습니다.


기술개발실 후배님들께 부탁드립니다. 업무실적부진이 몇 년간 누적된 것이지만 기술개발실이 처에서 팀으로 무너지는데 불과 1.5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독립실 부활하는 데까지 1년이 걸렸고 다시 처급으로 가는데 3년이 소요되었습니다. '무너지면 다시 세우면 되지 뭐, 1년 걸렸는데!' 혹자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세우는데 1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업무 변혁적으로는 10년 이상 걸린 겁니다. 다음에 무너지는 속도는 더욱 빠를 겁니다. 그리고 다시 세우는 것? 이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3년 연속 승격대상 모두가 100% 진급한 것은 희귀한 일인데 비결은 무엇입니까? 성과는 기본이고 비결은 '겸손'입니다. 잘 나갈 때일수록 몸을 낮추고 고객을 대하듯 부드럽고, 상대방을 존중하면 승격자를 내지 못하는 그런 불행은 오지 않습니다.


향후 기술개발실이 해야 할 사항들이 많습니다. 자체 개발한 로봇과 신장비의 미국 웨스팅하우스로 수출, 국산화 TBN Blade, GEN Coil생산과 세계 시장으로 진출, 원전 제염/해체기술개발, 30년 후 시장변화 예측에 따른 정비기술 개발...

제가 이런 말을 꺼내면 누군가 '미쳤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기술개발실에 와서 기술을 팔겠다고 하니 누군가 '미쳤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기술을 팔았으니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인 겁니다. 저는 공부하고 계획을 세운 것인데 저를 비난한 사람은 빈 머리를 갖고 한 말입니다. 한 방 먹이시려면 꾸준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의 '고향'이란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기술개발실이 가는 길은 그렇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외롭고 험한 길입니다.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는 외롭고 험난한 길을 가야 하지만 여러분들은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하는 넓은 시야, 판단력, 예지력, 상상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熱情!!!'. 공부한 것은 덤입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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