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2)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2) (이철수著, 삼인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사는 동안 꽃처럼

키 큰 나무들이 위로위로 자라느라

허전하게 비워둔 자리에서 키 작은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교목의 숲에 관목의 자리가 있는 거지요.

봄날 사람의 눈높이가 관목의 꽃자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산길에서 자주 만나게 됩니다.

꽃도 곱고 새잎도 아름답습니다.

우러러보지 않아도 될 만큼 그저 그만한 높이에 피어나는 꽃의 화사한 만개는,

갓 낳은 어린 생명을 보듬은 세상 모든 어미들의 눈웃음처럼 넉넉해 보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세상에 왔습니다.

와서 새 생명을 낳고, 꽃처럼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

사는 동안 꽃처럼 살게 되기 비는 봄날입니다.


인간만이

한 이틀 비바람에 말랐던 초목이 젖어듭니다.

속속들이 젖은 숲에서 새들도 비에 젖어 웁니다.

비는 무겁지만, 비도 와야지요.

새들도, 나무도, 풀포기도 그걸 압니다.

세상에 와서 사는 뭇 생명이 모두 깊은 지혜의 화신들인 듯싶습니다.

스스로 지혜로운 양 하는 사람만,

조용히 받아들여야 할 자연과도 마주 서 싸우려고 합니다.

어리석지요.

이틀 비바람에 지레 쏟아져 내린 꽃이 많습니다.

낙화가 하도 생생하고 고와서 잠시 마음 흔들립니다.

그래봐야 꽃 한 송이 되살리지 못합니다!


그저 아는 사이

개구리 울어 목이 쉬는 봄날

뜰에 덜어져 내린 철쭉 흰 꽃이

밤하늘별처럼 아름답다

개구리하고 철쭉 아는 사이냐고 물었더니

그저 아는 사이라고 했다.

나하고도 그저 아는 사이인 것처럼

그렇게, 봄날은 간다. 봄날이 갔다.


하루

오늘 점심은 뭐냐고 묻다

아내에게 짧은 지청구를 듣는

여름 한 낮

댓잎 흔드는 바람이

나에게도 와서 이야기를 건네고...

하루 평온무사.

그를 고마워하면서,

저무는 해와 작별하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오늘도 해가 설핏할 무렵에

아내 혼자 밭에 나갔습니다.

그렇게 아내만 밭으로 가고

저는 작업실에 있는 날이 제일 좌불안석입니다.

함께 들에 나가, 함께 해진 길을 걸어

들어오는 시간은 참 좋지요! 혼자서

농사 다 하는 듯 장한 그림을 그려서

새기기도 하지만, 밭농사 하면 어느 집

할 것 없이 여인들의 수고가 많습니다.

비 오실 거라고, 매전 밭을 마저 매고 있는

아내를 잠시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내 그림을 자주 그린다고들 하십니다.

대한민국 남편들이 대개 마음에 아내의 그림 그리고 살걸요?

미안하고 고마워서!


금도의 뜻

어느 사회나 존경스러운 어른들이 계시지요?

그런 어른들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금도가 있다는 거지요.

남을 용납하는 아량, 그게 금도의 뜻입니다.

시장에 흘러넘치는 물건들 못마땅하실법한 검박한 차림의 어른이,

화려한 진열대를 한껏 재미있어 하시면서도

절대 손에 들고 가시는 법은 없습니다.

내게 필요한 물건은 아니라하시는 표정입니다.

노안의 안경너머로, 가벼운 웃음까지 지어보이는 그 이는 어느 다른 사회의 권력자이셨습니다.

당신 존재의 그림자에나 조용한 눈길 보내며 사는 듯한 그 노령이 깊어 보이고 부끄러웠습니다.


착해 빠진 사람 떠나도

그 들에, 운행. 양살구. 두충. 산수유가 가을이었습니다.

조문 다녀오는 길에 잠시 들러본 권정생선생 유택 언저리에서,

당신 살아서 심었을 나무들 소식이 그랬습니다.

- 네 형님 안 계셔도 가을이다!

빈 뜰에서 그렇게 들었습니다.

- 그럼요! 그러시는 줄 압니다.

그리 대답했습니다.

일직에도 천지가 가을이었습니다.

착해 빠진 사람 세상 떠나도, 가을오고 겨울 오는 법이지요.

착해 빠진 사람들도 또 태어나고 자라고, 그러다 늙어 다시 떠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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