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 오지랖

막걸리 번개팅, 미래포럼

by 물가에 앉는 마음

오지랖이 넓지 않은데 뚜쟁이 역할을 많이 하게 된다. 2007년 서울대 경영자과정에 갔을 때는 수많은 모임을 만들었다. 전력그룹사 직원들만 모였으나 서로가 서먹서먹한 상태라 남자들끼리 친해질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서로 부대끼며 막걸리 한잔 하는 것 같아 여러 모임을 만들었다.

경영자과정 개설취지가 공부도 하는 것이지만 인적네트워크 구축에 의한 협업체계 구축이라 나는 후자를 택했다. 또한, 2시에 수업 끝나 집에 들어가면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구조 조정되었나?' 하며 쳐다보는 눈초리도 따가운 시절이니 시간 죽이는 구실도 필요했다.


정문으로 퇴근하는 학우들의 ‘정문 빌리어드클럽’, 낙성대 쪽으로 퇴근하는 학우들의 ‘후문 빌리어드클럽’을 만들고 정문, 후문 통합전을 치러 막걸리 한잔 빼앗아 먹는 맛이 기가 막혔다. 가끔 땡땡이도 치니 1시부터 대놓고 낮술 먹기 위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다니는 학우들의 ‘2호선은 달린다.’ 3호선 학우들도 빠질 수 없으니 ‘3호선도 달린다.’ 모임은 1차가 끝나도 해가 지지 않아 할 수 없이 2차를 가야 하는 모임이었다.

일원동 먹자골목을 애용하는 학우들 모임인 ‘일원동파’는 낙성대역 월매네 주막에서 1차, 도곡동에서 2차, 일원동에 가서야 3차가 끝나는 징한 사람들 모임으로 여러 모임을 주선하다 보니 1년 동안은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스케줄이 빡빡한 시기였다. 그 결과 경영자과정 수료식 때 받은 우수논문상의 논문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서울대 인근의 경기부양에 성공했다고 받은 모범동기상은 경영자과정 25년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상이라 한다.


본사 복귀 후 상황을 보니 예전 본사에 근무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 처, 실간 교류가 적었다. 조직 간 벽을 허물어 보기 위해 ‘잘 생긴 사람들 모임’을 만들었더니, 나는 못생겼다고 끼어주지 않냐 는 항의가 들어와 그를 위해 ‘못 생긴 사람들 모임’을 만들었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을 위한 ‘좋은 사람들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다가 어느 모임에나 참석하는 내 정체성이 모호해져서 ‘막걸리 번개팅’으로 단일화했다. 직장인들이 모여서 막걸리 한잔 나누며 이야기하다 보면 군대이야기, 축구이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회사이야기가 종착지이니 평소에 풀지 못했던 업무이야기를 하면 술기운 때문인지 몰라도 이야기가 술술 풀려 나가는 듯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모두 이야기가 통하는데 조직 간 회의를 하면 부서이기주의를 타파하지 못해 부서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되며 이야기하면 할수록 논리를 개발하게 되어 논리의 철옹성화 또는 고착화되는데 이러한 문제점은 비단 우리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서와 조직 간의 이기주의는 사일로 효과(Organizational Silos Effect)라는 경제용어가 탄생할 만큼 보편화되어 있는 현상이다. 반면 막걸리 번개팅은 부서 간 이기주의를 용광로에 넣고 녹여내어 통합시키는 Melting Pot Effect가 있는 듯하다.


모든 업무가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해도 결국에는 운영하는 사람이 문제다. 사람과 사람이 친하고 서로를 알자 하여 만든 것이 막걸리 번개팅인데 꽤나 인기 있는 모임이 되었다. 서로가 전화로, 컴퓨터로만 업무협의를 했던 관계에서 막걸리 번개팅 이후에는 마주 앉아 차 한 잔 하며 업무협의를 하게 되니 이전보다는 업무가 잘 풀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벌써 6년 정도 운영하고 있는데 서로가 스폰서를 자청하며 번개팅을 주선해 달라는 주문이 밀려들어온다. 하지만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있어도 마음은 사지 못하고 아름다운 저택을 살 수 있어도 행복한 가정은 돈으로 사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여러 개 있다.

우리 회사 막걸리 번개팅 스폰서십도 쉽게 살 수 없는 것 중 하나다. 콘서트 입장권보다는 조금 싼 1인당 10만 원짜리 스폰서십은 번개팅 개최공지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매진되어 돈 주고 살 수는 있지만 구하는 것이 오바마대통령 만나는 것만큼 어렵다. 나는 첫 번째 모임에서 모임주관자 자격으로 10만 원짜리 스폰서십을 구한 이후 6년간 한 장도 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놀고먹는 모임만 만들어 막걸리만 먹고 다니는 것은 아니고 일하는 모임도 만든다. 최근에는 조직도 복잡해지고 업무도 다양화되어 특정부서만의 업무는 많지 않고 여러 부서가 관련된 업무가 대부분이다. 담당자가 이 부서, 저 부서를 다니면서 사전 협의를 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법률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Risk Management와 Hedge방안이 핵심이니 우리 부서가 의견을 내도 절대적 의견은 아니다. 구상단계의 사업이니 검토대상이 아니다. 실행계획을 갖고 오면 검토하겠다. 이러저러한 사유는 모두 맞는 이야기지만 가끔은 부서 협의가 여의치 않아 업무에 회의를 느끼고 자기 조직의 벽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일 해보자고, 회사 현안에 대해 난상토론을 하는 ‘한전KPS 미래포럼’을 만들었다. 해당업무와 관련된 부서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술개발과 사업 방향, 타당성, 추진전략의 적합성 등을 난도질해 보는 회의다. 소위 이런 포럼 형식을 끝장토론이라 한다. 물론 회사라는 조직 내 회의이니만큼 난도질이 쉽지 않지만 포럼운영과 토의 원칙을 세웠더니 회의 분위기가 자못 살벌해졌고 이미 전통으로 굳어졌다.


사회 보면서 이야기하는 첫 번째 멘트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한전KPS 미래포럼에 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지금부터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계급장 떼고 토론합니다. 참석하신 전무님도 예외 없이 계급장을 떼야합니다. 단, 욕설은 허용치 않으며 대안 없는 반박은 하지 않습니다. 제시된 안건에 대한 부문별 추진부서와 추진기한은 회의 중 정합니다.’

회의에 참석하시는 전무님도 예외 없이 계급장 떼고 토론하셨으며 얼마 전 회의에 참석한 외부 인사는 ‘공기업 회의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의외이고 놀랍다. 우리도 벤치마킹을 해야겠다.’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입사 후 30년이 지났는데 매일 놀고먹는 것 같아도 유일하게 잘한 일이 있다면 ‘한전KPS 미래포럼’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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