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3) (최진석著, 열림원刊)
- 중요한 것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뿐이지요.
조지 오웰 ‘동물 농장’: 모든 존재는 ‘스스로’ 무너진다.
농장에서는 동물들이 인간의 독재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늙은 수퇘지 한 마리가 인간의 야비함을 지적하며 혁명을 호소하자 동물들은 분노에 휩싸여 혁명을 일으키고 인간들을 축출한다. 동물들은 ‘동물주의’를 내세우며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 하지만, 읽고 쓸 줄 안다는 이유로 돼지들이 권력을 잡고 스스로 세운 규칙마저도 지키지 않는 특권층이 되자, 동물주의 사회는 결국 독재 사회로 전락한다, 독재로서의 변질을 막기에 다른 동물들은 더없이 무지하였고 지도자에게 너무 쉽게 현혹되었다. 인간의 독재를 타도하고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던 동물들의 혁명은 돼지들의 선민의식과 다른 동물들의 무지로 인해 인간이 지배할 때보다 더 심한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는 독재로 퇴보했다.
자기를 섬기는 사람들이 정치적 행위를 할 때 그들의 정치는 매우 건강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섬기는 데에 실패한 사람들이 하는 정치는 혼란스러워요. 즉 자기를 섬기는 것이 정치에 있어서도 근본이 된다는 뜻입니다.
‘왜 혁명에 성공하지 못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스스로 혁명하지 않은 채 혁명을 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스스로 혁명한다는 말은 스스로를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를 혁명하지 못한 사람이 혁명을 시도하면 그 혁명은 성공할 수 없어요. ‘동물농장’은 스스로 혁명하지 않은 자들, 자기를 섬기지 않은 자들이 벌이는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이야기입니다.
정치는 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정치가 생기기 전에는 세계의 문제를 신이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 세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르자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정치와 철학은 이렇게 생겨났고 신의 권위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이렇듯 정치와 철학은 역사적 책임을 안게 된 인간이 스스로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할 때 인간은 복종하기만 하면 됐지요. 그런데 정치가 태동하고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면서 말하기는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그리스에서는 말 잘하는 사람을 ‘레토 Rhetor'라고 했고 그들은 웅변가이자 정치가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사용하는 고도의 수사법을 ‘레토릭 Rhetoric’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폭력을 쓰지 않고 말하기를 통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고안된 장치입니다.
철학은 개념으로 하는 것이지만 정치의 핵심은 말입니다. 말을 얼마나 신뢰 있게 하는지, 자기가 한 말을 얼마나 지키는지가 정치의 바름을 판단하는 기본적인 잣대입니다. 말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정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정치가 길을 잃었다는 뜻이지요. 많은 사람이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한 말을 지키라고 하지요. 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정치가 신뢰를 잃게 됩니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치를 혐오하게 되고 정치를 멀리 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정치를 외면하기만 하면 자기보다 못한 정치인들에게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독립한 후로는 정치를 통해서만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지금 우리의 문제, 즉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입니다. 정치를 포기하면 야만에 가까워지고 문제해결은 영영 불가능해집니다.
농장주인 존즈 씨는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존즈는 모진 주인이긴 했어도 유능한 농사꾼이었습니다. 근래 들어 소송에서 지는 바람에 돈을 날린 그는 울적해서 매일 술타령을 합니다. 술 마시고 빈둥거리자 일꾼들은 주인을 속이고,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며 축사지붕은 헐고, 동물들에게 먹을 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존즈가 스스로 무너져 늙은 수퇘지 메이저가 다른 동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거죠. 누구도 다른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없어요. 모든 존재는 스스로 망하는 것입니다. 국가도, 정권도, 기업도 스스로 무너지지요.
루쉰 ‘아Q정전’: 나는 아Q인가 아닌가.
자기 멋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덤비면 이익이 없다. 모든 지적인 공부와 수련은 자기 멋대로 세상을 해석하는 무지를 이겨내려는 겸손한 도전이다. 정신 승리법은 종종 사람들이 파멸하고 나라가 몰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심리적 기대를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는 외교나 내정에는 정신 승리법이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쓰디쓴 좌절로 이어진다. 모욕을 당하면서도 저항하기보다는 그것이 모욕이 아니라고 스스로 자위한다. 무력감과 노예근성의 발로다. 이것을 가르쳐주고 깨우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희망은 있다. 그렇지 않다면 희망이 없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묻는다. 나는 아Q인가 아닌가. 나와 아Q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
데미안의 구절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 일이 제일 힘들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그런데 어려운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선물이 주어집니다. 바로 건너가는 힘이지요.
돈키호테도 자기를 향해 걷는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섬기는 삶에 대해 살펴봤다면 자기를 섬기지 않는 자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아Q정전’에서는 자기를 섬기지 않는 인간이 소용돌이치는 역사 속에서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는지, 얼마나 초라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요.
루쉰은 ‘아Q정전’에서 사람들이 빠져있는 정신승리법을 이야기합니다. 과학적이지 않고 심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소해 버리는 겁니다. 자기가 굴욕 당했을 때도 ‘나에게 굴욕감을 주는 저 사람이 나쁜 거야. 나는 착한 사람이야. 그래서 이건 굴욕이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왜 정신승리에 빠질까요? 우리는 심리적으로 편안한 것을 행복으로 착각합니다. 눕고 싶을 때 눕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이런 심리적인 편안함을 행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행복이 아니라 심리적 안일함입니다. 행복은 자기 존재를 얼마나 확장시키고 얼마나 독립적으로 유지하는지와 같은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눕고 싶어도 눕지 않는데서 ‘인간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먹고 싶을 때 먹는다면 동물과 차이가 없지요. 심리적 편안함을 행복이라고 안일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자기 존재에 철저히 물을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삶은 자기와의 투쟁으로 안일함을 추구하는 심리와 투쟁하는 거죠.
아Q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 자신과 진실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자기가 바라는 것을 가져야 해요. 간절한 바람은 각성을 일으키고, 각성과 함께 고요를 경험하고, 그 고요 속에서 솟아나는 소명을 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힘들고 귀찮아한다면 나중에 나는 ‘왜 행복하지 않아?’, ‘사회는 왜 이러지?’ ‘나는 이걸 하고 싶은데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못 하는 거야.’라는 소리만 하게 됩니다.
조선말기의 지식인들이 아Q처럼 유효성이 지난 주장만 붙들고 현실과 일치하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우리에게도 같은 점이 있는데 생각하는 능력이 길러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정신승리법을 적용해요. 굴욕을 굴욕이라 하지 않고, 욕을 먹고도 그 사람들 표현법이 그렇다며 심리적 기대와 객관적 사실을 착각합니다. 아Q가 그렇지요. 객관적 사실이 심리적 기대와 전혀 다른 것임에도 자기의 심리적 기대가 객관적 사실로 구현될 것처럼 믿거나 심리적 기대 자체를 객관적 사실로 착각합니다.